첫 출근 날, 열네 살에 사라진 친구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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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 날, 열네 살에 사라진 친구를 다시 만났다

두 번째 이력서 끝에 잡은 첫 출근

송민서는 서른일곱 해를 살면서 이력서를 이백 통 가까이 썼다. 지난 이 년 동안 면접에서 떨어진 숫자만 헤아려도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그 끝에 겨우 붙잡은 자리가 고향 근처 소도시 설촌의 작은 지역아동센터, 생활복지사 자리였다. 혼자 몸이 아픈 어머니를 돌보며 서울살이를 접고 내려온 민서에게는 이번 첫 출근이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출근 전날 밤, 옷장 구석에서 낡은 가방을 꺼내 뒤적이던 민서는 손끝에 걸리는 두꺼운 스프링 노트 하나를 발견했다. 표지가 다 닳고 모서리가 둥글게 말린 그 노트는 중학교 시절 짝꿍이던 현아와 번갈아 쓰고 그리던 낙서장이었는데, 왜인지 선뜻 버리지 못하고 가방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엄마, 나 내일부터 진짜 출근하는 거야."

민서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어머니 등 뒤에서 괜히 큰 소리로 말해보았다. 어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래, 밥은 먹고 가라" 하고 짧게 대답했지만, 그 무심한 한 마디에도 민서는 왠지 울컥 목이 메었다.

첫 출근 날, 사라졌던 고향 친구와 마주치다

다음 날 아침, 센터 문을 열고 들어선 민서는 복도 끝 원장실 앞에서 걸음을 뚝 멈췄다. 안쪽에 낯익은 옆얼굴이 보였는데, 설마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민서야?"

돌아선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열네 살 봄,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동네를 떠나버린 현아였다. 십오 년 넘는 시간이 두 사람 사이에 쌓여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민서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 센터장이야, 내가."

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끝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이었고, 민서 역시 반갑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필 첫 출근 날 상사로 마주치다니, 운명이 짓궂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색한 공기를 깨며 문이 벌컥 열리고,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성큼 들어와 책상 위 서류를 손으로 와르르 쓸어버렸다. 현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긴장으로 굳었다.

"쟤 또 저런다. 이번 달에 세 번째예요, 선생님."

지켜보던 병구 아저씨가 혀를 끌끌 차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는 센터에서 이십 년 가까이 일한 늙은 사회복지사로, 아이들 사이에서는 '할아버지 선생님'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현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전출 서류'라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고, 그 말에 민서의 가슴이 또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전출이요? 애를 다른 데로 보낸다는 거예요?"

현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준우가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째로 시설을 옮긴 아이이고 이번에도 문제가 반복되면 엄마와 더 먼 지역 시설로 보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서는 첫 출근 날부터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듣게 될 줄 몰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말 없는 아이와 서먹한 센터장

그날 오후, 민서는 준우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목적실로 향했다. 준우는 구석 자리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고, 색연필 통을 내밀며 "선생님이랑 그림 그릴래?"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됐어요" 한 마디뿐이었다.

쭈뼛쭈뼛 다가섰던 민서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퇴근 무렵 원장실을 찾아가 준우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말했지만, 현아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곧 알게 될 거야, 천천히 해"라는 말만 건넬 뿐이었다.

"십오 년 만에 만났는데, 넌 여전히 네 할 말만 하는구나."

불쑥 튀어나온 말에 민서 스스로도 놀랐다. 현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고, 그 침묵이 오히려 민서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현아가 내놓은 계획, 노트 한 권

다음 날 아침, 현아가 먼저 민서를 찾아와 겉표지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평범한 줄공책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마음일기'라 부르며 준우에게 조금씩 건네보라고 했다.

"말로 안 되는 애들은 꼭 글로도 안 되는 게 아니거든. 그냥 매일 한 장씩, 네가 먼저 뭘 적어서 책상에 놓아두고 가. 답을 바라지 말고."

현아는 거기에 두 가지를 더 덧붙였다. 절대 먼저 다가가서 묻지 말 것, 준우가 스스로 다가올 자리를 만들어 둘 것, 그리고 아이가 무언가에 반응하면 고치려 들지 말고 그냥 따라가 줄 것.

"그거 되는 거 맞아? 너무 느긋한 거 아니야?"

민서가 반쯤 못 믿겠다는 얼굴로 묻자, 현아는 피식 웃으며 "느린 게 맞는 거야, 이 일은" 하고 짧게 답했다. 그 웃음이 오랜만에 예전 그 얼굴 같아서, 민서는 순간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찢어진 노트, 터진 말다툼

민서는 매일 아침 준우의 책상에 공책을 올려두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귀퉁이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오늘 축구함"이라는 한 줄이 적힌 걸 발견하고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고, 일주일 뒤에는 준우가 먼저 "같이 할래요?"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공책에 적힌 질문 하나가 문제였다. "선생님도 버려진 적 있어요?"라는 문장을 보고 민서는 당황한 나머지 "그런 거 없어, 걱정 마"라며 서둘러 웃어넘겼다. 그 순간 준우의 표정이 싹 굳었고, 거짓말이라는 걸 바로 알아챈 눈빛이었다.

"거짓말할 거면 하지 마세요! 다들 그래요, 저만 보면 다 괜찮다고!"

준우는 공책을 집어 들어 쫘악 찢어버리고는 문을 쾅 닫고 뛰쳐나갔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현아는 찢어진 종이와 넋이 나간 민서를 번갈아 보더니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솔직하게 말을 안 했어? 그 애가 바라는 건 정답이 아니라 진짜였는데."

민서는 울컥 서러운 마음이 솟아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너나 잘해! 그때 너도 똑같았잖아, 아무 말 없이 가버렸으면서 지금 와서 누구한테 솔직함을 가르쳐!" 말이 뱉어지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주워 담을 수 없었고, 현아는 아무 대답 없이 돌아서 가버렸다.

옛 스케치북이 꺼내던 그날의 진실

그날 저녁 민서는 가방 안쪽에 넣어두었던 낡은 스프링 노트를 떠올렸다. 펼쳐보니 삐뚤빼뚤한 그림과 유치한 농담들 사이로 "나중에 커서도 친구하자"는 글씨가 눈에 들어와 울컥했다.

다음 날, 사과하려 원장실을 찾은 민서보다 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눈이 조금 부어 있었고, 뜻밖에도 담담한 목소리로 옛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우리 아빠 사업 망해서, 하루 만에 짐 싸서 떠난 거였어. 학교에 쪽지 하나 남겨뒀는데, 담임 선생님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못 찾았다는 얘기 나중에 들었어. 그 시절 나, 준우랑 똑같았어. 낯선 동네에서 아무도 못 믿어서 매일 화만 냈거든."

그 말을 듣고서야 민서는 왜 현아가 그토록 준우를 신경 쓰는지 비로소 이해가 됐다. "미안해, 어제 그렇게 말해서." 먼저 고개를 숙이자 현아는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고, 책상 위 낡은 스프링 노트를 발견하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머, 이거… 아직도 있었어?"

두 사람은 한참 낡은 페이지를 넘기며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 민서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는데,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이 낙서장을 준우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준우는 처음엔 시큰둥하게 노트를 밀쳐냈지만, 삐뚤빼뚤한 그림 속 어린 민서와 현아의 낙서를 발견하고는 조금씩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어릴 때 친구가 아무 말 없이 떠나서 많이 울었어. 지금도 가끔 그 생각나면 마음이 아파. 저번에 거짓말해서 미안해." 민서가 작은 목소리로 진짜 이야기를 꺼냈다.

준우는 아무 말 없이 노트를 쓰다듬다가 느지막이 "...저도요"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에 민서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다시 쓰는 첫 줄

몇 주가 지나고 준우는 더 이상 책상을 뒤엎지 않았다. 매일 아침 새로 산 공책에 그날 기분을 그림으로 그려 민서에게 내밀었고, 전출 서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민서야, 저녁에 떡볶이 먹으러 갈래? 우리 옛날에 자주 갔던 그 집, 아직도 있더라."

현아가 퇴근 무렵 불쑥 물었다. 민서는 방긋 웃으며 가방을 챙겼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센터 문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며 민서는 가방 속 낡은 스프링 노트를 손끝으로 쓸어보다가, 이번엔 집어넣는 대신 책상 서랍 한 칸에 고이 남겨두고 나왔다.

저녁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골목을 걸으며, 민서는 핸드폰 메모장에 '내일 할 일'을 적어 넣었다. 맨 첫 줄에는 다른 무엇보다 "준우 그림 칭찬해주기"라고 적었고, 그 아래로 소소한 하루 일정을 이어 적으며 오랜만에 마음 한구석이 가볍게 찰랑거렸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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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형 자기방어

준우가 '선생님도 버려진 적 있어요?'라는 질문에 민서가 즉각 '그런 거 없어'라며 서둘러 둘러댄 장면은, 자신의 상처를 들키지 않으려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말해버리는 흔한 방어 반응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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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된 분노

민서가 현아에게 '너도 똑같았잖아'라고 쏘아붙인 것은 준우의 문제로 쌓인 당혹감과 자책을, 가장 가까운 사람인 현아에게 그대로 옮겨 터뜨린 전형적인 전치(轉置)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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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동일시

현아가 유독 준우를 세심히 신경 쓴 이유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하루아침에 떠나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 아이에게서 보았기 때문으로, 과거의 자신을 돌보듯 아이를 대하는 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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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물을 통한 감정 표출

준우가 말보다 공책 귀퉁이의 짧은 메모로 먼저 마음을 연 것은, 직접 대면하는 대화보다 글이나 그림 같은 완충 장치를 통할 때 감정을 더 안전하게 꺼낼 수 있다는 심리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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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의 정서적 닻

민서가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온 중학생 시절 낙서장이 결국 준우와의 벽을 허무는 열쇠가 된 것은, 낡은 물건이 과거의 안전했던 감정을 현재로 불러오는 정서적 닻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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