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온 옆집 할아버지, 떨리던 붓끝의 비밀

새로 이사 온 날, 옆집에서 들려온 그 소리
이사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오후, 장맛비가 양철 차양을 투둑투둑 두드렸고 서은은 흠뻑 젖은 종이박스를 품에 안고 계단 앞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팔 년차 웹툰작가로 구독자 십이만 명을 모았던 연재작 '달빛정원'이 악플 테러로 멈춘 뒤로, 그녀는 펜을 쥐기만 하면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삼 년치 원고를 서랍 깊숙이 밀어넣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이 재개발 예정 골목 다세대주택 삼층으로 숨어들었지만, 짐 몇 개 옮기는 일조차 혼자선 버거웠다.
그러다 손에 든 박스 손잡이가 뚝 끊어지며 그릇들이 와르르 쏟아졌고, 요란한 소리에 놀란 옆집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어허, 이 복도가 자네 혼자 쓰는 줄 아나?"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노인은 눈썹이 짙고 콧수염이 희끗한, 한눈에도 까칠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말할 때마다 틀니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고, 몸에 밴 듯한 유성물감 냄새가 복도까지 은은히 퍼졌다. 서은이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바람이 휙 불어와 노인의 품에서 낡은 스케치북 한 권이 툭 떨어져 계단 아래로 또르르 굴러갔다. 서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던져 빗물 고인 바닥에서 그것을 주워 들었다.
"저기요,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스케치북을 받아 들고 집 안으로 사라졌는데, 표지 안쪽으로 언뜻 보인 색연필 번호와 깨알 같은 메모 글씨가 서은의 눈에 어쩐지 오래 남았다. 그 뒷모습이 묘하게 허전해서 서은은 한동안 비 맞은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밤마다 들리는 그 소리, 날선 말다툼
이사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서은은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숨이 턱 막혔다. 그런데 밤 열한 시만 되면 옆집에서 사각사각 붓이 벽을 긁는 소리가 꼭 들려왔고, 이어폰을 꽂아도 그 소리만은 귓속을 파고들었다. 마감 압박에 시달리던 예전 버릇 때문인지 환청까지 겹쳐, 사흘째 되는 날에는 두통까지 더해져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서은은 결국 잠옷 바람으로 옆집 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지, 밤마다 그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는데요."
문을 열고 나온 노인은 서은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고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잠귀가 왜 그렇게 얇으냐며 혀를 끌끌 찼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잠귀가 왜 그렇게 얇나 그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 신경 끄게."
그러고는 짧게 한마디를 던지고 문을 탁 닫아버렸다. 서은은 허탈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얼굴로 한참을 복도에 서 있다가, 결국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씩씩거렸다.

정전된 밤, 옆집 문턱을 넘다
보름쯤 지난 어느 밤, 장마 끝물 천둥이 우르릉 치더니 동네 전체에 정전이 났다. 손전등도 못 찾고 휴대폰 배터리도 오 퍼센트밖에 남지 않아 허둥지둥 서랍을 뒤지는데, 복도에서 쿵 하는 소리와 가느다란 신음이 들려왔다. 놀라서 문을 열어보니 노인이 현관 앞에 쓰러진 채 더듬더듬 벽을 짚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일어나 보세요."
겨우 노인을 부축해 들어간 집, 촛불 아래 드러난 벽에는 미완성인 커다란 벽화 스케치가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 메모가 가득한 그 그림은 섬세했지만 가장자리로 갈수록 선이 흔들리고 번져 있었는데, 노인은 자신의 이름이 봉수라고 밝히며 삼십 년 가까이 중앙극장 간판을 그리며 살았다고 했다. 재개발로 곧 철거될 이 골목 담벼락에, 아내가 떠난 지 삼 년이 되는 올해 마지막으로 이 그림을 걸고 싶다고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이거… 할아버지가 그리신 거예요?"
"아내가 생전에 그려둔 도안이야. 요즘은 손이 떨려서 선이 자꾸 어긋나."
"자네, 그림 그린다고 들었는데.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서은은 가슴이 철렁했다.
예전 라이브 방송에서 손이 떨려 선을 못 그었던 기억이 울컥 떠올랐고, 사람들 앞에서 다시 선을 긋는 건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제안, 세 걸음의 계획
"처음부터 큰 걸 바라는 거 아니야."
봉수는 품에서 손때 묻은 작은 수첩을 꺼내더니, 날짜별로 빼곡하게 적힌 일정을 촛불 아래 펼쳐 보였다. 글씨는 삐뚤빼뚤했지만 계획만큼은 또렷했다.
"우선 매일 저녁 벽 앞에서 가벼운 낙서부터 해보고,"
"다음 주말엔 동네 사람들 보는 데서 같이 밑칠을 하는 거지. 그렇게 손을 풀다 보면 축제 전날까진 마무리할 수 있을 거야."
"저는… 자신 없어요. 지금 그렸다가 또 망치면 어떡해요."
"
망치면 다시 그리면 되지. 그날 자네가 이 스케치북을 주워주지 않았으면, 난 벌써 포기했을 거야.
"
결국 서은은 떨리는 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봉수의 부엌 식탁 한구석에서 몰래 꺼낸 색연필로 작은 낙서를 끄적여 보는데, 선 하나하나가 서툴면서도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손끝이 떨렸다
토요일 오후, 동네 사람 열댓 명이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와 담벼락 아래 자리를 깔았고, 봉수와 서은은 사다리를 놓고 밑그림 위에 흰 밑칠을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그럭저럭 손이 따라주었다.
그런데 한 꼬마가 담벼락 아래서 구경하다가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
"어? 이상하게 그렸다! 선이 삐뚤빼뚤해요!"
주변에서 와하하 웃음이 터졌고, 서은의 손끝은 그 순간 거짓말처럼 뚝 떨리기 시작했다. 붓끝이 쭉 미끄러지며 애써 그려둔 밑그림 한쪽이 보기 흉하게 뭉개졌고, 하얀 밑칠이 지저분하게 번져나갔다. 서은은 붓을 내려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을 뛰쳐나갔다.

다투고 돌아선 밤, 드러난 비밀
그날 밤 봉수가 문을 두드렸고, 두 사람은 현관 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왜 말도 없이 가버려. 그 정도 가지고."
"그 정도요?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망신당했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처음부터 못 한다고 했잖아요!"
서은의 목소리가 울먹이듯 갈라졌다. 봉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손에 쥔 스케치북을 꽉 움켜쥐고 돌아섰다.
이틀 뒤, 서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봉수의 집을 다시 찾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식탁에 앉아 색연필 뚜껑을 하나씩 더듬어 열어보던 그는, 빨간색과 초록색을 자꾸 헷갈려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할아버지, 지금… 색이 잘 안 보이세요?"
봉수는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몇 해 전부터 눈 가운데가 뭉개져 보이는 병을 앓고 있다고, 병원에서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아내와의 약속 때문에 포기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숨겨왔다고, 담담하지만 울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제야 서은은 밤마다 들리던 그 붓질 소리와 흔들리던 선들의 이유를, 그리고 봉수가 왜 그토록 자신을 붙잡았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그날 주워주었던, 그 후로도 돌려주지 않고 간직해온 스케치북을 꺼내 펼쳤는데, 거기엔 색 번호와 작은 메모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
여기, 색 번호 다 적혀 있어요. 제가 손으로 긋고, 할아버지가 번호를 불러주시면 되겠어요.
"

무지개 골목, 함께 그린 마지막 선
축제 전날 저녁, 두 사람은 다시 사다리를 놓았다. 지난번 비웃던 꼬마가 쪼르르 다가와 이번엔 돕겠다며 물감 통을 하나씩 건네주었고, 서은의 손끝은 여전히 떨렸지만 봉수가 불러주는 색 번호를 따라 한 칸씩 채워가다 보니 어느새 그 떨림은 리듬이 되어 있었다.
"일곱 번, 주황."
붓이 벽을 긁는 사각사각 소리가 둘만의 암호처럼 이어졌고, 노을이 담벼락을 붉게 물들이는 동안 무지개의 색이 한 줄씩 완성되어 갔다. 구경하던 동네 사람들도 어느새 박수 대신 숨죽여 지켜보았다.
마지막 줄, 무지개의 가장 윗선을 긋고 나서 서은은 붓을 내려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완성된 벽화 앞에서 봉수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뭉개진 색들 사이로도 아내가 그려둔 무지개의 윤곽만은 또렷이 느껴지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밤, 서은은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아 낡은 태블릿 펜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첫 선 하나를 그었다.
다음 날 아침, 서은은 창문을 활짝 열고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간밤의 빗물이 마른 담벼락 위로 무지개가 찰랑찰랑 빛나고 있었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다시 펜을 들었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회피형 도피
서은이 악플 테러로 상처받은 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골목으로 이사해 숨어버린 것, 그리고 첫 공동작업에서 실패한 뒤 아무 말 없이 골목을 뛰어나간 장면 모두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몸을 숨겨 버리는 전형적인 회피 반응이에요.
확증편향적 오해
밤마다 들리는 붓질 소리를 단순한 소음으로만 해석해 다투었던 것처럼, 상대의 사정을 모른 채 자기 불편함을 기준으로만 상황을 판단하면 쉽게 오해와 갈등이 쌓인다는 걸 보여줘요.
동병상련의 연결감
서은은 손이 떨리고 봉수는 눈이 흐려진다는, 서로 다르지만 닮은 결핍을 알게 된 순간부터 둘의 관계가 급격히 가까워졌어요.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에게 마음이 열리는 현상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에요.
호혜성의 법칙
이사 첫날 서은이 아무 조건 없이 주워준 스케치북 한 권이, 훗날 봉수가 그녀를 믿고 부탁하는 결정적 이유가 되고 클라이맥스의 해결책인 색 번호 메모로까지 이어져요.
작은 친절이 돌고 돌아 돌아오는 모습이에요.
단계적 노출을 통한 두려움 극복
봉수가 서은에게 처음부터 완성을 요구하지 않고 낙서, 밑칠, 공개 작업 순으로 단계를 나눠 제안한 것은 두려운 대상에 조금씩 노출시켜 공포를 줄여가는 방식이에요.
중간에 한 번 크게 실패했지만 결국 그 단계들이 서은의 두려움을 낮춰주는 발판이 되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