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된 밤, 택시 안에서 되살아난 아버지의 목소리

반응형

해고된 밤, 택시 안에서 되살아난 아버지의 목소리

해체 통보 받은 밤

극장 로비의 불이 반쯤 꺼진 채 깜빡이고 있었고, 성우는 대표의 말이 끝났는데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월급 통장도, 다음 작품 큐시트도, 모든 게 오늘 자정을 기점으로 사라질 참이었다.

그는 팔년째 작은 극단 초록무대의 사운드 디렉터였다. 가난한 극단이었지만 음향 큐 하나에도 밤을 새우며 매달렸고, 가방 안엔 늘 손바닥만 한 배터리 스피커를 넣고 다녔다. 클라이언트 앞에서 급히 소리를 들려줘야 할 때를 위해서였는데, 오늘 밤엔 그게 다른 용도로 쓰일 줄은 몰랐다.

그에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었다. 언제고 자기 이름을 건 작은 스튜디오를 열어서, 라디오 성우였던 아버지가 남긴 릴 테이프를 가장 좋은 스피커로 다시 틀어주는 것. 하지만 지금은 그 테이프조차 자기 손에 없었다. 두 달 전 극단 장비 수리비가 급해 자기 돈을 보태다가, 결국 아버지의 유품인 녹음기까지 전당포에 맡긴 탓이었다.

"성우야, 미안하다. 이달 말로 극단 접기로 했어."

대표는 성우의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며 그 말만 되풀이했다. 성우는 뭐라 따지고 싶었지만 목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저는... 월급은요?"

대표는 봉투 하나를 건넸다. 퇴직금이라며 급하게 챙긴 돈이었는데, 세어보니 공교롭게도 전당포 상환금과 딱 맞아떨어지는 액수였다. 그리고 상환 기한은 바로 오늘 밤, 자정이었다.

자정 전당포, 택시를 잡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시 반이었다. 지하철은 이미 끊겼고 버스도 막차가 떠난 뒤였다. 전당포까지는 택시로 삼십분, 자정까지 딱 삼십분이 남아 있었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택시비를 내면 상환금에서 모자랄 게 뻔했고

, 모자란 채로 가면 만수 아저씨가 받아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걸어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성우는 손에 봉투를 꽉 쥐고 도로 가장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그는 지나가던 빈 택시를 향해 허둥지둥 손을 흔들었다. 차가 철퍼덕 멈춰 서는 순간, 성우는 속으로 딱 한 번만 운이 따라주길 빌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성우는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주소를 불렀다. 기사는 룸미러로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별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말다툼 끝에 만난 택시기사 창수

그런데 차가 큰길 대신 좁은 뒷길로 꺾어 들어가자, 성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방향이 영 아닌 것 같았다.

"아저씨 이 길 아닌데요? 빨리 가야 하는데요."

"다리가 막혀서 그래요, 공사 중이라."

"그럼 미리 말씀을 하셔야죠! 지금 시간이 없어서, 자정 넘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고요."

말이 날카롭게 튀어 나가고서야 성우는 아차 싶었다. 기사는 아무 대꾸 없이 운전만 했고, 차 안엔 라디오 지지직 소리만 간간이 섞여 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중, 성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라디오 주파수 다이얼을 살짝 틀었다. 순간 지지직거리던 소리가 뚝 사라지고 노랫소리가 깨끗이 흘러나왔다.

"오, 손 빠르네. 뭐 하는 사람이야?"

"사운드... 음향 하는 사람이에요. 였고요, 이제는."

창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기사는 그제야 미터기 쪽을 한 번 보더니, 길게 돌아가는 대신 다른 지름길로 핸들을 꺾었다. 그리고 넌지시 성우의 사정을 물었고, 성우는 봉투 속 돈과 전당포와 아버지의 테이프 이야기를 뚝뚝 끊어가며 털어놓았다.

창수의 계획

창수는 피식 웃더니 자기도 한때는 음향 쪽 사람이었다고 했다. 변두리에서 작은 레코드 가게를 했었는데, 시디가 다 인터넷으로 넘어가면서 결국 문을 닫았다고.

"나도 한때 음반 가게 했었어. 망해서 이 짓 하고 있지, 허, 참."

둘은 서로 비슷한 처지라는 걸 깨닫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성우가 "저도 오늘부터 백수예요" 하자 창수가 "환영회는 못 해주고 요금만 깎아주지" 하며 받아쳐서, 긴장된 차 안에 잠깐이나마 따뜻한 웃음이 돌았다.

"일단 늦더라도 가긴 가자. 만수 그 양반 알지? 거기 셔터 내리는 걸 보고도 두드리면 열어줄 수도 있어."

"근데 혹시 늦으면... 그 테이프 값을 네 입으로 설명해. 돈으로 안 되면 말로 해봐, 그 수집가한테."

성우는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말로 어떻게 설득한단 말인가, 상대는 수집가고 자신은 그냥 돈 없는 음향쟁이일 뿐인데.

"너 그 테이프, 들어본 적 있어?"

"그냥... 디지털로 옮겨놓긴 했는데, 제대로 들은 적은 없어요. 바빠서."

"그럼 지금 들어, 가는 동안."

창수의 말에 성우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달 전 전당포에 맡기기 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급하게 디지털로 옮겨둔 파일이었다. 재생 버튼을 눌렀지만 차 안이 시끄러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가방 속 손바닥 스피커를 꺼내 귀에 가까이 대고, 처음으로 아버지의 목소리를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2분 늦은 도착

차는 자정을 이 분 넘긴 시각, 전당포 앞에 멈춰 섰다. 셔터는 이미 절반쯤 내려와 있었고, 성우는 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셔터를 두드렸다.

"저기요! 만수 아저씨!"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대신 골목 안쪽에 세워진 낡은 승합차 한 대, 그 옆에 상자를 옮기는 노년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 겉면엔 분명히 아버지의 릴 테이프 녹음기가 들어 있었다.

"이미 넘겨받았어요. 거래 끝났습니다."

노인은 짧게 그 말만 남기고 상자를 다시 승합차에 실으려 했다. 성우는 다리에 힘이 쭉 풀려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이렇게 늦게 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였다.

핸드폰 속 목소리

성우는 다급히 손바닥 스피커를 꺼내 핸드폰에 연결했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그는 노인의 팔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선생님, 1분만요. 딱 1분만 들어주세요."

노인은 귀찮은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낮고 깊은 목소리에 그의 발이 뚝 멈췄다. 라디오 드라마 대본을 읽는 듯한, 오래된 방식의 느릿한 성우 목소리였다.

노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는 한 발짝 다가와 핸드폰을 거의 빼앗듯 받아들더니, 테이프 속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미간을 좁히고 들었다. 그러다 울컥 뭔가 올라오는 듯한 표정으로 성우를 올려다봤다.

"이거... 이정식 씨 목소리 아닙니까?"

"제 아버지세요."

노인의 이름은 박 선생이었다. 그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젊었을 때 같은 방송국에서 신입 연출로 일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가장 깐깐하면서도 가장 따뜻했던 선배 성우가 바로 성우의 아버지였다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방송국 옥상에서, 당신 아버지가 날 다 혼내면서도... 커피를 타주셨었는데."

박 선생의 눈가가 붉어졌고, 성우도 덩달아 코끝이 먹먹해졌다. 거래를 끝냈다던 그 말과 달리, 박 선생은 상자에서 녹음기를 다시 꺼내 성우 손에 건넸다. 값은 상환금만 받겠다고, 그는 짧게 덧붙였다.

다시 울린 벨소리

성우는 봉투에서 상환금만 꺼내 박 선생에게 건넸고, 나머지 돈은 그대로 주머니에 남았다. 녹음기를 품에 안은 채 차로 돌아오니 창수가 창문을 내리고 씩 웃고 있었다.

"아저씨, 이 미터기 요금... 이걸로 될까요?"

"됐어, 그냥 타. 나도 오늘 좋은 거 들었잖아."

창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우는 녹음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의 막막함 대신, 뭔가 단단한 것이 가슴속에 자리 잡은 기분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낡은 릴 테이프 녹음기를 꺼내 전원을 꽂았다. 지지직거리는 소리 끝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는 그제야 처음으로 테이프를 끝까지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창수에게 전화를 걸어 짧게 한마디를 건넸다.

"아저씨, 그 라디오 요즘도 지지직거려요? 제가 가서 한번 봐드릴게요."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

전이된 분노

성우가 실직과 상환 기한 압박으로 초조해진 상태에서 창수의 우회로 선택에 과도하게 날카롭게 반응한 장면은, 실제 원인(해고 통보)이 아닌 눈앞의 대상(기사)에게 감정이 옮겨가는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

소지품을 통한 정체성 유지

성우가 항상 손바닥 스피커를 챙기고 다니는 습관은 직업을 잃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음향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붙잡으려는 심리로 읽을 수 있어요.

🧠

동질감에서 오는 신뢰

창수가 과거 음반 가게를 접었던 비슷한 실패 경험을 털어놓자 성우가 급격히 마음을 여는 장면은, 같은 처지라는 공감이 낯선 사람 사이의 신뢰를 빠르게 만든다는 걸 보여줘요.

🧠

회피했던 기억 직면하기

성우가 몇 달째 디지털로 옮겨두고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던 테이프를 위기의 순간에 처음 끝까지 듣는 장면은, 두려워서 미뤄둔 감정을 궁지에 몰렸을 때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모습이에요.

🧠

과거 인연에 대한 그리움의 투사

박 선생이 녹음 속 목소리 하나로 옛 선배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내며 거래를 뒤집는 장면은, 오래된 인연에 대한 미해결된 감정이 예상치 못한 순간 터져 나오는 심리를 담고 있어요.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