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병간호 끝, 짝꿍이 건넨 돋보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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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병간호 끝, 짝꿍이 건넨 돋보기 하나

돋보기를 쥔 아이

먼지책방의 셔터를 올리는 손이 오늘도 먼저 떨렸다. 마흔을 앞둔 선재는 책 냄새보다 익숙해진 소독약 냄새를 코끝에 매달고 살았다. 2년 전부터 어머니 유정희의 눈이 조금씩 뿌옇게 흐려지더니, 이제는 돋보기를 대고도 신문 제목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혼자 가게를 지키고 혼자 어머니를 돌보는

오랜 병간호의 나날

이, 어느새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유정희는 아들 앞에서 유독 괜찮은 척을 했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도 괜찮다, 간판 글씨가 안 보여도 괜찮다, 그 말버릇이 선재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선재가 바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가 넘어지지 않고, 자신도 하루쯤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는 것, 그뿐이었다.

책방 서랍 깊숙한 곳에는 손잡이가 낡아 반질반질해진 작은 황동 돋보기가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짝꿍이었던 지완이 칠판 글씨를 영 못 읽어 쩔쩔매던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가 주신 그 돋보기를 선재가 슬쩍 건넨 적이 있었다. 지완은 전학을 가기 전날, 그 돋보기를 가만히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고마웠어'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선재는 그 뒤로 이십육 년 동안 그 돋보기를 서랍 속에 넣어두고도 좀처럼 다시 꺼내 쓰지 않았다. 그저 가끔 서랍을 열 때마다, 그 애의 동그란 뒤통수가 문득 떠오르곤 했다.

며칠 전에는 어머니가 계산대 앞에서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잘못 건넸다. 선재가 화들짝 놀라 달려가자 어머니는 능청스럽게 웃어넘겼다.

"아유, 내가 돈을 세는 게 아니라 감으로 세는 거지, 감으로!"

어머니는 그렇게 넘겼지만, 선재는 그날 밤 몰래 계산대 서랍을 정리하며 한참을 먹먹한 가슴으로 앉아 있었다. 웃음 뒤에 숨은 어머니의 두려움을 모르는 척하기가,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넘어진 날, 마감된 분기

그러다 보름 전, 결국 일이 터졌다. 밤중에 화장실을 가려던 어머니가 문턱에 걸려 쿵, 넘어지는 소리에 선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응급실로 달려가는 택시 안에서 손목이 부러진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있던 그 순간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얘, 괜히 돈 쓰지 말고 그냥 가자. 뼈 좀 부러진 거 가지고 뭘…"

하지만 담당 의사는 손목보다 눈 쪽이 더 문제라고 했다. 망막 상태가 생각보다 빠르게 나빠지고 있어서, 더 미루면 보행 훈련이나 지팡이 지원 같은 저시력 재활 등록 자체가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복지사는 분기별로 접수 인원이 정해져 있어서 이번 주 안에 신청서를 넣지 않으면 다음 분기, 석 달을 꼬박 기다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간으로 지팡이며 확대독서기를 사려면 수십만 원이 훌쩍 넘는다는 말에 선재는 말문이 막혔다. 책방 매출로는 당장 그 돈을 마련할 자신이 없었다. 석 달을 더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가 또 넘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선재는 그 밤,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처음으로 눈물을 뚝뚝 쏟았다.

"나는 그런 거 신청 안 해. 지팡이 짚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데…"

선재는 더는 혼자 끌어안고 버틸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사회복지사가 건넨 전화번호 하나, 구청 산하 저시력 재활센터의 번호를 손에 쥐고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재활센터에서 마주친 얼굴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와 선재를 맞았다. 명찰에는 저시력 재활지도사 이지완이라는 이름이 작게 박혀 있었다. 또렷한 목소리와 자연스러운 몸짓이라 선재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상담 서류를 작성하다가 선재가 습관처럼 주머니 속 낡은 황동 돋보기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지완이 문득 손을 멈추고 물었다.

"그 돋보기… 혹시, 손잡이에 작게 별 모양이 새겨져 있지 않아요?"

선재가 화들짝 놀라 돋보기를 뒤집어 보니, 정말로 손잡이 끝에 손톱만 한 별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지완이 피식 웃으며 명찰을 가리켰다. 선재는 그 순간 삼십 년 가까운 시간이 와락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야, 짝꿍. 3학년 2반, 맨 뒷자리 지완이. 못 알아보겠어?"

"야, 너… 그, 그 돋보기를 아직도 기억하냐? 와, 이거 진짜…"

반가움도 잠시, 선재는 이내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넘어진 일, 분기 마감, 지팡이값 걱정까지 쏟아내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지완은 끝까지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완이 건넨 세 가지 약속

다 듣고 난 지완은 서류철을 탁 덮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세 가지라고,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가며 또박또박 짚어주었다.

"첫째, 이번 주 금요일까지 어머니랑 같이 와서 저시력 등록 신청서를 넣어야 해요. 분기 마감 전에요."

"둘째, 저랑 집에 한 번 가서 안전 점검을 해요. 문턱이나 계단, 위험한 데를 미리 손봐야 또 안 다치시니까."

"셋째는… 선재 씨요. 보호자 모임에 한 번만 나와봐요.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면, 오래 못 가요."

지완은 금요일이 지나면 다음 접수까지 석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또박또박 강조했다. 선재는 달력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남은 시간은 겨우 나흘이었다.

돌아선 걸음, 깨진 약속

선재는 그날부터 저녁마다 어머니를 설득했다. 지팡이를 짚는 게 창피한 일이 아니라 더 오래, 더 안전하게 걷기 위한 거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했다. 어머니는 끝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금요일 아침 두 사람은 함께 센터로 향했다.

상담실에 들어서자 지완이 부드럽게 검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저시력 장애 등록이라는 말이 서류에 적히는 순간, 유정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장애요? 나는 그냥 눈이 좀 나쁜 거라고 했잖아요, 왜 장애라고 써요!"

선재가 어머니 손을 붙잡으며 괜찮다고, 등록을 해야 지팡이도 지원받을 수 있다고 달랬지만 어머니는 그 손을 탁 뿌리쳤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됐어, 안 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넌 내가 어떻게 될지 하나도 몰라!"

어머니는 그 말을 끝으로 상담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선재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앉아 있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지완을 바라보았다. 잘 해보려던 하루가, 순식간에 엉망으로 무너져 있었다.

걷는 법을 아는 사람

더 큰 문제는 그날이 바로 접수 마감일이라는 것이었다. 센터 문은 오후 여섯 시면 닫히고, 어머니 없이는 등록 서류를 완성할 수 없었다. 시계는 벌써 오후 네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완아, 이제 어떡하냐… 엄마가 저렇게 가버렸는데."

지완은 당황하지 않고 가방에서 접이식 흰 지팡이를 꺼내 톡, 펼쳤다. 그제야 선재는 그녀가 상담실 안에서도, 복도를 걸을 때도 단 한 번도 벽이나 책상에 부딪히지 않았던 게 그냥 익숙함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스무 살 넘어서부터 시력이 거의 다 떨어졌어. 지금은 밝고 어두운 거 정도만 겨우 구분해."

선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삼십 분 전까지도 또각또각 걸어 다니던 그녀가 실은 세상을 거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지완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알아차린 듯, 담담하게 웃었다.

"어머님은 지금 등록이 무서운 게 아니라, 다시는 선재 씨 얼굴을 못 볼까 봐 무서운 거예요. 그 말, 제가 가서 전해볼게요. 대신 그 돋보기 좀 저 주세요."

지완은 접수 마감 시간을 삼십 분 늦춰달라고 센터에 부탁해 둔 뒤, 선재와 함께 먼지책방으로 향했다.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들어서는 지완을 보고 어머니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머니, 저도 안 보여요. 그런데 이 돋보기, 선재가 스물여섯 해 전에 저한테 줬던 거예요. 그때 저도 이거 짚는 게 창피해서 숨기고 다녔거든요."

유정희는 가만히 그 돋보기를 받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손잡이 끝의 작은 별 모양을 더듬던 손끝이 가늘게 떨리더니, 끝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는 그제야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꺼내 보였다.

"지팡이 짚으면… 영영 못 걸을 사람 같잖아. 네 결혼식도, 손주 얼굴도 다 놓칠까 봐, 그게 무서웠어."

"엄마,

지팡이는 못 걷는 사람이 짚는 게 아니라, 더 오래 걷고 싶은 사람이 짚는 거야

. 지완이도 저렇게 잘 다니잖아."

유정희는 한참을 훌쩍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서둘러 책방을 나섰고, 마감을 코앞에 두고 다섯 시 오십오분에 겨우 센터 문을 다시 밀고 들어갔다.

지팡이 소리, 햇살 속으로

서류에 도장이 쿵 찍히는 순간, 선재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저시력 재활 등록이 무사히 끝났고, 다음 주부터 지팡이 보행 훈련과 확대독서기 지원이 시작된다는 안내문을 받았다.

몇 주 뒤, 어머니는 처음으로 지팡이를 짚고 혼자 모퉁이 슈퍼까지 걸어갔다 왔다. 톡, 톡, 톡, 보도블록을 두드리는 소리가 골목 끝까지 울렸고, 선재는 가게 앞에 서서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얘, 나 혼자 다녀왔다! 저 앞집 강아지가 또 나와서 짖는 거 있지, 아주 요란하더라."

어머니는 웃으며 주머니 속 돋보기를 꺼내 선재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다음에 또 이게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그때 건네주라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지팡이를 또각또각 두드리며 책방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선재는 그 작은 별 모양을 손끝으로 한 번 쓸어보고는,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책방 문을 따라 들어갔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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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자 소진(캐어기버 번아웃)

선재가 2년 넘게 혼자 가게와 어머니 돌봄을 동시에 떠안으며 병원 복도에서 처음 눈물을 쏟는 장면에서,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버티다 지쳐가는 돌봄자의 전형적인 소진 과정을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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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否認)과 수치심 반응

유정희가 '장애'라는 단어에 격하게 반응하며 상담실을 나가버리는 장면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순간 느끼는 수치심을 회피하려는 심리적 방어로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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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 이유와 진짜 두려움의 분리

어머니가 처음엔 '동네 사람들 시선'을 이유로 들었지만, 실제로는 아들의 결혼식과 손주를 못 볼까 봐 두려웠다는 고백에서, 사람은 종종 진짜 두려움을 더 다루기 쉬운 이유로 바꿔 말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

자기 개방을 통한 신뢰 형성

지완이 자신도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먼저 털어놓자 유정희가 마음을 열었는데, 이는 같은 처지를 먼저 드러낸 사람에게 사람들이 훨씬 쉽게 마음을 여는 자기개방 효과를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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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 물건을 통한 기억의 재구성

26년 전 주고받은 돋보기가 재회의 단서가 되고, 다시 어머니를 설득하는 매개체로 쓰이는 흐름은, 오래된 물건 하나가 관계와 감정을 새롭게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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