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낙방 후 바닷마을, 낯선 손을 다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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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낙방 후 바닷마을, 낯선 손을 다시 만나다

다섯 번째 낙방, 구름포로 떠나다

다섯 번째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진 날, 윤이안은 책상 서랍에 처박아둔 오래된 책들을 꺼내 상자에 담았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에 이제 와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게

무모하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지만, 더는 합격자 발표 화면을 새벽까지 들여다보며 울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품었던 꿈은 작은 책방 주인이었다. 부모님은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고, 퇴직금이나 다름없는 전세보증금을 헐어 바닷마을 구름포에 가겠다고 했을 때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래도 이안은 짐을 쌌다. 구름포행 버스표 한 장과, 평생 모은 절판본 책 백여 권이 전 재산이었다.

구름포에 도착한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계약한 가게는 선착장 근처 낡은 건물 1층이었는데, 그 자리를 얻느라 전세보증금을 거의 다 밀어넣은 터라 손이 떨렸다. 정류장 지붕 아래서 짐을 정리하는데, 바로 옆에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는 낯선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점퍼에 낚싯대 가방을 멘 할아버지는 버스가 끊긴 걸 모르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내 건넸다. 어차피 자신은 몇 걸음만 걸으면 가게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아이고, 괜찮소. 젊은 사람이 이 비에 우산을 왜 나를 주나."

"저는 저기 보이는 데 들어가면 끝이에요. 할아버지 쓰고 가세요, 버스 끊겼어요."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우산을 받아들고는 이름도 묻지 않고 꾸벅 고개만 숙이고 사라졌다. 이안은 비에 쭈뼛쭈뼛 젖은 어깨를 털며 괜히 웃음이 났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런 바보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계약한 가게, 땅이 울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구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모든 게 흔들렸다. 건물 뒤편 지반에 침하 흔적이 발견되어 정밀 안전진단 없이는 영업허가가 나올 수 없다는 통보였다. 보증금을 다 밀어넣은 가게였다.

"지반 침하 위험 등급이라 이대로는 허가가 안 나요. 안전진단 통과하고 보강계획서까지 올려야 합니다."

전화를 끊은 이안은 가게 앞 계단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돈도 시간도 없는데 안전진단이라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데도 없다는 생각에 울컥 목이 메었다.

"…어떡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때 맞은편 생선가게에서 비린내를 풍기며 고등어를 손질하던 할머니가 흘끗 이쪽을 쳐다봤다. 눈매가 날카로워서 처음엔 괜히 긴장이 됐다. 그 할머니가 바로 명자였다.

비린내 나는 가게 앞, 까칠한 명자 할머니

달리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이안은 생선가게 문턱을 넘었다. 명자는 고등어 내장을 꺼내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거기 쓰러져가는 건물에 뭘 한다고? 책방? 생선 비린내 밴 데 책 다 썩어나가."

"그래도 해보고 싶어서요. 안전진단 때문에 막혔는데, 혹시 방법이 없을까요."

명자는 한숨을 푹 쉬더니 손을 씻고 나와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러고는 뜻밖에도 이장이 예전에 구청 건축과에 오래 몸담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서류만 제대로 올리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거였다.

"안전진단 재신청서에 보강계획서 넣어서 이장한테 가져가 봐. 그 양반이 도면 볼 줄 아니까."

서류 세 장과 축제 전까지

명자가 짚어준 계획은 세 가지였다. 안전진단 재신청서와 보강계획서를 올리고, 이장을 통해 임시 영업허가를 받고, 모자란 돈은 이안이 들고 온 절판본 책들을 팔아 채우는 것. 문제는 시간이었다.

"다음 주 구름포 축제 전까지 못 열면 건물주가 계약 깬다고 할 거다. 그 안에 끝내야 해."

이안은 밤을 새워가며 보강계획서를 손으로 그리고, 상자 속 책들을 꺼내 하나하나 가격표를 붙였다. 손이 아릴 만큼 애지중지 모은 책들이었지만, 지금은 가게를 살리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서류를 가져가는 길에 명자가 또 비린내 얘기를 꺼내며 "손님도 안 올 텐데 왜 이렇게 애를 쓰냐"고 던진 한마디가 이안의 속을 긁었다. 안 그래도 지쳐 있던 터라 참았던 말이 와르르 터져버렸다.

"그러면 처음부터 도와주지 마시지 그러셨어요!"

명자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가게로 들어가 버렸다. 이안은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어 멀어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후회했다. 괜히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반려된 서류, 다시 닫힌 문

다음 날 구청에 제출한 서류는 보강계획서 도면에 설계사 직인이 없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축제는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지금 당장 설계사를 구할 돈도 인맥도 이안에게는 없었다.

"도면에 설계사 직인이 없으면 이대로는 접수 처리가 안 됩니다."

전화를 끊은 이안은 가게 앞 젖은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비는 또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명자와 싸운 뒤로 연락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게 여기서 끝나는 건가 싶어 숨이 턱 막혔다.

그런데 저만치서 우산을 들고 걸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명자였다. 말다툼 따위 잊은 사람처럼 무뚝뚝하게 우산을 씌워주며 가게 안으로 이안을 끌어당겼다.

"싸웠다고 안 도와줄 거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 일단 들어와, 비 맞지 말고."

그날 우산을 빌려준 사람

명자는 바로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분 뒤 우비를 걸친 할아버지가 헐레벌떡 가게 앞으로 뛰어왔는데, 이안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첫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건넸던 바로 그 할아버지였다.

"아니, 그때 그 우산 아가씨 아니요? 허, 참, 이런 인연이 다 있나."

이안은 울컥 목이 메어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서류를 내밀었다. 이장은 도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자기가 예전에 신세 진 적 있는 설계사 동창이 있다며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보겠다고 했다.

"내가 그 친구 집 지붕 고칠 때 자재 다 대준 적 있어. 지금 당장 전화해보지."

그날 밤 셋은 전화기를 돌려가며 도면을 고치고, 메일로 보정본을 보내고, 직인을 받아 다시 팩스로 넣기를 반복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구청 담당자가 마감 몇 시간을 남기고 서류를 접수해줬다는 문자가 도착했을 때, 이안은 그 자리에서 왈칵 울어버렸다.

구름포 책방, 첫 손님을 맞다

축제가 열리던 아침, 안전진단이 무사히 통과됐다는 소식과 함께 임시 영업허가가 떨어졌다.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간판을 걸고, 밤새 닦아둔 책장에 절판본들을 하나씩 꽂았다.

"비린내 나도 괜찮다니까. 생선 손질 끝나면 내가 제일 먼저 가서 책 살게."

명자가 비린내 나는 앞치마 그대로 들어와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자 둘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책 표지에 작게 묻은 고등어 비늘 한 조각 때문이었다. 이장도 뒤따라 들어와 가장 비싼 절판본을 턱 집어 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마을 사람들이 축제 구경을 나왔다가 하나둘 가게 안으로 들어와 책을 뒤적거렸다.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첫 책을 포장하며, 누구에게도 교훈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게 문 앞에 낡은 우산 몇 개를 담은 바구니를 내놓고, 작은 쪽지 하나를 매달았을 뿐이었다. 비 오는 날 누구든 들고 가도 된다는, 그 쪽지였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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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성의 심리

이안이 첫날 아무 조건 없이 우산을 건넨 작은 친절이 결국 서류 마감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이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돌아왔어요.
사람은 받은 호의를 기억하고 갚으려는 경향이 강하게 작동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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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에 대한 방어적 경계

명자 할머니가 처음 만났을 때 비린내 핑계로 이안의 책방을 깎아내린 건 실은 낯선 사람의 꿈이 성급히 무너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을 거친 말투로 가린 것에 가까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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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누적으로 인한 자기효능감 저하

다섯 번의 시험 낙방을 겪은 이안이 안전진단 통보 전화를 받고 계단에 주저앉는 장면은, 반복된 실패가 작은 위기에도 쉽게 무너질 듯한 불안을 키운다는 걸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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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적 분노의 전치

이안이 명자의 비린내 농담에 과하게 날선 반응을 보인 건 사실 서류와 돈, 시간에 대한 불안이 쌓여 있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터져 나온 것에 가까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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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겪은 위기 이후의 유대감 강화

서류를 함께 고치고 마감을 넘긴 그날 밤 이후, 명자와 이장, 이안 사이에 생긴 웃음과 농담은 같은 위기를 함께 넘긴 사람들 사이에 급격히 가까워지는 심리를 잘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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