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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설명회서 재회한 옛 연인, 지갑 속 낡은 명함 한 장번역가 하준, 다시 찾아온 유학 기회새벽 두 시, 번역 원고 파일을 닫으려던 하준의 모니터에 메일 알림이 똑 울렸다. 베를린의 한 공공정책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최종 합격을 알리는 그 메일을, 그는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화면 아래 찍힌 날짜를 보다가 그는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십 년 전 이맘때, 똑같은 합격 통지서를 받고도 결국 가방을 풀었던 기억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서른넷, 하준은 영어와 독일어 번역으로 밥벌이를 해온 지 벌써 팔 년째였다. 남들은 그를 성실한 프리랜서라 불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책상 앞에 앉아 남의 문장을 옮기며 늘 반쪽짜리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졌던 그해, 유학 가방을 풀어버린 뒤로 그는 한..
가게 인수 조건, 도장 아니라 개였다마흔을 앞두고 연 문 앞에서한도경은 서른셋에 회사를 그만뒀다.퇴사 통보를 하던 날 팀장이 물었다.나가서 뭐 할 거냐고.도경은 웃기만 했다.모아둔 돈은 크지 않았다.프랜차이즈는 엄두도 안 났다.부동산 앱을 뒤지다 골목 안 작은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간판은 낡았고 유리문엔 손때가 묻어 있었다.'형제 열쇠'라는 이름의 도장·열쇠 가게였다.주인은 최병수, 일흔여섯이었다.이 자리에서만 삼십팔 년째 앉아 있다고 부동산 아저씨가 말했다."젊은 사람이 이런 가게를 왜 하려고?"처음 만난 날 최 씨 할아버지가 물었다.도경은 대답 대신 가게 안을 둘러봤다.구석 바닥에 낡은 담요 위로 늙은 개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쟤는 방울이.신경 안 써도 돼."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도경..
화분 밑에 숨겨둔 열쇠목차열쇠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삼천만 원짜리 침묵 다락에서 나온 상자 이웃집 박씨 할머니 못 보낸 편지 발걸음을 돌리기까지 하마터면 놓칠 뻔한 것 문 앞에서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열쇠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현관 화분 밑, 정은은 손끝으로 흙을 헤집었다. 열쇠는 십이 년 전 그대로 거기 있었다. 녹이 슬어 붉은 자국이 손가락에 묻어났다.어머니가 요양원으로 옮긴 지 두 달째였다. 삼 남매 중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정은뿐이었다. 오빠는 지방 발령 중이었고, 언니 정희는 애초에 연락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낡은 나무 대문을 밀자 삐걱, 오래된 경첩 소리가 골목까지 퍼졌다. 마당의 감나무는 정은의 키를 훌쩍 넘어 자라 있었다. 저 나무를 심을 때 정은은 아직 초등학생이었다.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