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내음보다 먼저 한숨이 마중 나오는 작은 바닷가 마을 ‘물마루’. 한때는 검은 바다를 누비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로 새벽을 열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텅 빈 테왁만이 늙은 해녀들의 주름진 손처럼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마지막 남은 해녀들마저 물질을 접는다는 소식에 마을은 묵직한 슬픔에 잠겼다. 그 중심엔 평생을 바다에 바친 강순옥 할머니가 있었다. 꼬장꼬장한 성품 뒤에 누구보다 깊은 바다 사랑을 품은 그녀였다.
“이대로 우리 대에서 해녀 맥이 끊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어느 날, 순옥 할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마을 회관에 모인 몇 안 되는 늙은 해녀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해녀 학교를 열어야겠어. 우리 숨비소리, 우리 삶의 지혜, 젊은 것들한테 넘겨주고 가야지 않겠나.”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동료 해녀들도 순옥 할머니의 진심 어린 눈빛에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물마루 해녀 학교’의 문이 열렸다.
뭍에서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도시의 팍팍한 삶에 지쳐 새로운 도전을 찾아온 영희, 폼 나는 해녀복에 반해 덜컥 지원서를 낸 철수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해녀가 뭐, 그냥 물에 들어가서 전복 따고 소라 캐는 거 아니에요?”
철수의 가벼운 말에 순옥 할머니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놈아! 바다가 니 놀이터인 줄 아나? 여긴 목숨 걸고 물질하는 곳이여!”
첫날부터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해녀 학교의 하루는 동트기 전부터 시작됐다.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숨을 참는 훈련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얕은 물에서도 허우적거리기 일쑤였고, 이퀄라이징은 또 어찌나 어려운지 귀가 터질 듯 아팠다. 영희는 매일 밤 몰래 눈물을 훔쳤고, 철수는 ‘괜히 왔다’며 투덜거렸다.
“할머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고생을…” 영희가 볼멘소리를 하자, 곁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말순 할망이 퉁명스레 받아쳤다.
“고생? 이게 고생이면 느그들 할미, 어미는 평생을 지옥에서 살았다. 바다는 정직해. 딱 노력한 만큼만 내주는 곳이여.”
젊은 세대와 할머니 세대의 생각 차이는 훈련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할머니들은 무조건 “깡으로 버텨!”를 외쳤고, 젊은이들은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해요!”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요즘 것들은 참을성이라곤 약에 쓰려고 해도 없어.” “꼰대들은 말이 안 통해.” 서로를 향한 날 선 말들이 오갔다.
순옥 할머니는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단순한 기술만이 아니라, 바다를 대하는 해녀의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싶었다.
어느 날, 영희가 무리하게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정신을 잃어가는 영희를 발견한 것은 순옥 할머니였다.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든 할머니는 노련한 솜씨로 영희를 끌어올렸다. 뭍으로 나온 영희는 꺽꺽 울음을 터뜨렸다. 순옥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영희의 등을 토닥였다. 그 따뜻한 손길에서 영희는 꾸지람보다 더 큰 가르침을 느꼈다.
“바다는 욕심내는 년한테는 아무것도 안 내줘. 딱 먹을 만큼만, 감사한 마음으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여. 그리고 옆 사람 숨소리도 들어야 하고. 바다에서는 다 한 식구니까.”
그날 이후, 영희의 눈빛이 달라졌다. 철수도 뺀질거리던 태도를 버리고 훈련에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가을, 마을 축제가 열렸다. 해녀 학교 학생들은 어설프지만 정성껏 준비한 물질 시연을 선보였다. 처음엔 코웃음 치던 마을 사람들도 젊은이들의 진심 어린 모습에 하나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순옥 할머니의 입가에도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예기치 않은 태풍이 물마루 마을을 덮쳤다. 거대한 파도가 방파제를 넘나들었고, 마을 앞바다 양식장은 속수무책으로 부서질 위기에 처했다. 남자들이 배를 띄우기엔 너무 위험한 상황.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순옥 할머니가 낡은 해녀복을 꺼내 입었다.
“할머니, 안 돼요! 위험해요!”
영희와 철수가 앞을 막아섰다.
“비키라! 내 새끼들은 내가 지킨다! 저 양식장이 우리 마을 사람들 밥줄이여!”
순옥 할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난 파도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영희와 철수,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서로의 눈을 마주 보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
“우리가 배운 게 이거잖아요! 함께 하는 거!” 영희가 외쳤다.
“할머니 혼자 가게 둘 순 없지!” 철수도 힘차게 소리쳤다.
거친 파도 속에서 늙은 해녀와 젊은 해녀들이 하나가 되었다. 서로 로프를 묶고, 찢어진 그물을 보수하고, 떠내려가는 부표를 건져 올렸다. 맹렬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았지만, 함께였기에 두렵지 않았다. 밤새 이어진 사투 끝에 태풍은 물러갔고, 동이 틀 무렵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양식장은 기적적으로 큰 피해를 면했다.
뭍으로 올라온 해녀 학교 식구들은 모두 탈진 상태였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어떤 역경도 이겨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유대감과 성취감이 어려 있었다. 순옥 할머니는 그 자리에 쓰러져 한동안 몸져누웠지만, 젊은이들의 극진한 간호와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천천히 기력을 회복했다.
몇 달 후, 물마루 해녀 학교의 첫 번째 수료식이 열렸다. 햇살 좋은 봄날, 말끔하게 해녀복을 차려입은 영희와 철수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이제 제법 해녀다운 늠름한 모습이었다. 몇몇은 마을에 남아 해녀의 길을 걷기로 했고, 또 다른 몇몇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바다에서 배운 지혜와 용기를 가슴에 품고 떠났다.
수료증을 한 명 한 명에게 건네주던 순옥 할머니의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둘러보며 힘주어 말했다.
“바다는 우리에게 삶을 주고, 우리는 그 바다를 지키며 살아가는 거란다. 그게 바로 해녀의 삶이지.”
그날 이후, 물마루 마을에는 젊은 해녀들의 맑고 힘찬 숨비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라질 뻔했던 해녀의 역사는 그렇게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며, 바닷가 마을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순옥 할머니는 오늘도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 씨앗이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날 날을 흐뭇하게 그려보고 있었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 사회적 학습 이론 (Social Learning Theory): 젊은 세대, 특히 영희와 철수는 베테랑 해녀인 강순옥 할머니의 행동과 태도를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물질 기술뿐만 아니라 해녀로서의 마음가짐과 바다에 대한 경외심을 학습합니다. 영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순옥 할머니의 전문가적인 대처와 이후의 따뜻한 가르침, 그리고 태풍 앞에서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할머니의 용기는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모델링(modeling) 효과를 제공하여, 그들의 행동 변화와 내면적 성장을 이끌어냅니다. 이는 단순한 지시나 명령보다 관찰과 모방을 통한 학습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줍니다.
- 인지 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의 해소 과정: 뭍에서 온 철수는 처음에는 해녀 일의 어려움과 엄격한 훈련 방식에 대해 "폼 나는 해녀복에 반해 덜컥 지원"했다는 가벼운 태도와 "괜히 왔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보입니다. 이는 자신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인지 부조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훈련에 참여하고, 동료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며, 특히 태풍이라는 극한 상황을 함께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헌신적인 노력)과 태도(해녀 일에 대한 진지함, 공동체 의식)를 일치시키며 부조화를 해소하고 긍정적인 자기 인식을 갖게 됩니다.
- 정체성 탐색과 확립 (Identity Exploration and Achievement): 영희와 철수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해녀 학교'에서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역할과 가치를 탐색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갑니다. 도시에서의 삶에 지쳤거나 뚜렷한 목표가 없던 그들은 혹독한 훈련,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 상황들을 겪으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갑니다. 수료식을 통해 이들은 '해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거나, 혹은 바다에서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는 자양분을 얻게 됩니다. 이는 에릭슨(Erikson)의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 중 청년기의 주요 과업인 정체성 대 역할 혼미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치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애착 형성 및 안전 기지로서의 공동체 (Attachment Formation and Community as a Secure Base): 해녀 학교는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구성원들 간의 깊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특히 강순옥 할머니는 젊은 학생들에게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보호자 역할을 하며, 그들이 심리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안전 기지'를 제공합니다. 영희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할머니의 즉각적인 구조와 위로는 학생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주며, 이는 이후 태풍이라는 더 큰 위협 앞에서 학생들이 용기를 내어 함께 맞설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이 됩니다. 이러한 긍정적 애착 경험은 개인의 회복탄력성을 높이고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합니다.
- 집단 응집력과 위기 상황에서의 이타적 행동 (Group Cohesiveness and Altruistic Behavior in Crisis): 태풍이라는 공동의 위협은 해녀 학교 구성원들의 집단 응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개인의 안전보다 공동의 목표(양식장 보호, 서로의 안전)를 우선시하는 모습은 위기 상황에서 개인의 이기심을 초월하여 집단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협력하는 인간 행동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특히 "우리가 배운 게 이거잖아요! 함께 하는 거!"라는 영희의 외침은 개인의 성장을 넘어 공동체적 가치가 내면화되었음을 시사하며, 이는 강력한 소속감과 상호 의존성이 이타적 행동을 촉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