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 아니… 강 원장. 여기 좀 봐줘유. 우리 순심이가 며칠째 밥도 잘 안 먹고, 영 시원찮네.”
햇살이 따사롭게 부서지는 어느 바닷가 마을, 허름하지만 정갈한 ‘강태웅 동물병원’의 문을 밀치며 들어선 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춘자 할머니였다. 그녀의 품에는 축 늘어진 늙은 개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한때 ‘독사’라 불리며 뒷골목을 주름잡던 강태웅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걱정 어린 부름에 익숙하게 고개를 드는, 평범한 시골 수의사 강 원장이었다.
“어디 봅시다, 할머니. 순심이, 괜찮아. 아저씨가 한번 볼게.”
태웅의 거칠어 보이는 손이 순심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눈빛은 예전처럼 날카롭지 않았지만, 여전히 깊은 곳에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과거를 청산하고 이 작은 마을에 흘러들어온 지 벌써 5년. 그는 철저히 과거를 숨긴 채, 아픈 동물들을 돌보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과묵하지만 실력 좋은 수의사 정도로 그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춘자 할머니는 이 마을 해녀들의 대모 같은 존재였다. 요즘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빠르게 사라져가는 해녀 문화였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물질하는 해녀들은 하나둘 나이 들어 바다를 떠나고 있었다.
“에휴, 내사 마, 이대로 우리 해녀들 씨가 마르는 건 못 보겄어. 그래서 말이다, 강 원장. 내가 해녀 학교를 한번 열어볼까 싶은데, 어떨 것 같나?”
어느 날,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춘자 할머니가 넌지시 태웅에게 물었다. 태웅은 약봉지를 건네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
“해녀 학교요? 뭐…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은 건조했지만, 춘자 할머니는 그 짧은 말속에서 어떤 지지를 읽었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며칠 뒤, 마을 어귀에는 ‘해녀 학교 학생 모집’이라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해녀 학교에는 의외로 몇몇 젊은이들이 지원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청년, 바다를 동경하는 아가씨, 심지어 춘자 할머니의 말썽쟁이 손자까지. 하지만 의욕만 앞섰지, 물질은커녕 바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한 오합지졸이었다. 춘자 할머니의 불호령이 매일같이 해변에 울려 퍼졌다.
태웅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운영에 필요한 낡은 산소통이 말썽을 부렸다.
수리할 곳도 마땅치 않고, 새로 사자니 자금이 부족했다. 끙끙 앓는 춘자 할머니의 모습을 본 태웅은 밤늦게 몰래 학교 창고로 가 산소통을 고쳐놓았다. 다음 날, 멀쩡해진 산소통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할머니를 보며 그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강 원장, 혹시 자네가…?”
“제가 뭘요. 지나가다 보니 누가 고쳐놨던데요.”
그의 투박한 친절은 그런 식이었다. 해녀 학교 학생들이 훈련 중 가벼운 찰과상이라도 입으면, 춘자 할머니는 으레 태웅의 병원으로 데려왔다. 그때마다 태웅은 묵묵히 치료해주며, 가끔은 바다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툭툭 던지듯 일러주기도 했다. 그의 말에는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다. 마치 바다를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해녀 학교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여름, 마을에 불청객들이 나타났다. 인근 도시에서 온 개발업자들이었다. 그들은 해녀들의 어장 근처에 대규모 해양 리조트를 짓겠다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해녀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였지만, 노인들과 몇몇 젊은이들만으로는 그들의 기세를 막기 역부족이었다. 험악한 인상의 용역까지 동원되자 마을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할머니, 저 사람들…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태웅은 춘자 할머니에게 조용히 경고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 예전의 ‘독사’처럼 번뜩였다.
결국 사달이 났다. 개발업자들이 측량 작업을 강행하려 하자, 해녀들과 마을 사람들이 이를 막아서며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춘자 할머니의 손자가 용역에게 떠밀려 바위 위로 넘어지며 머리를 다쳤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 그때,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난 태웅이 다친 아이를 안아 들고 용역들 앞을 막아섰다.
“거기까지.”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용역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태웅은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천천히 개발업자 쪽으로 걸어갔다.
“여보쇼들. 애들은 건드리는 거 아니오. 그리고 여긴 당신들 땅이 아니지 않소?”
“뭐야, 이 자식은? 당신이 뭔데 나서?”
개발업체 대표로 보이는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태웅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 그냥… 이 동네 수의사요. 그런데, 당신들 낯짝이 영… 불법 어업으로 재미 좀 보다가 쫓겨난 양반들 같은데, 맞나?”
그 말에 개발업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웅은 그들의 과거 검은 거래까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태웅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그들의 약점을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태웅은 그들이 예전에 몸담았던 조직의 이름과 몇몇 간부들의 이름까지 정확히 거론했다. 과거 ‘독사’ 시절의 정보망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깨끗하게 사업하고 싶으면 정당하게 하쇼. 이런 식으로 동네 사람들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당신들 미래도 별로 깨끗할 것 같지 않은데.”
태웅의 말에 개발업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마치 독사 앞에 선 개구리들처럼. 상황이 정리되자, 마을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태웅을 바라보았다. 춘자 할머니가 다친 손자를 부축하며 태웅에게 다가왔다.
“강 원장… 대체 당신은…?”
태웅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옛날에 좀… 복잡한 세상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동물 좋아하는 수의사고요.”
그때, 춘자 할머니가 태웅의 손을 잡았다. 주름지고 거친 해녀의 손이었지만, 그 어떤 손보다 따뜻했다.
“사람 과거가 밥 먹여주나?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안 그런가, 강 원장?”
그 말에 태웅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준 강 원장에게 고마워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 태웅은 더 이상 숨어 지내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는 당당한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 여전히 과묵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자주 떠올랐다.
해녀 학교는 계속되었다. 젊은 해녀들은 춘자 할머니의 가르침과 태웅의 보이지 않는 도움 속에서 무럭무럭 성장했다. 태웅은 종종 바다에 나가 그들의 물질을 지켜보았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숨을 참아가며 생명을 건져 올리는 해녀들의 모습에서, 그는 잊고 지냈던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삶에 대한 치열한 애정,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대감이었을 것이다.
몇 해가 지나, 해녀 학교는 어엿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춘자 할머니는 여전히 정정했지만, 이제는 젊은 해녀들이 바다를 이끌었다. 태웅의 동물병원에는 여전히 아픈 동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가끔은 해녀들이 갓 잡은 해산물을 한 아름 안고 찾아와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어느 늦은 오후, 노을이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태웅은 방파제에 앉아 멀리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해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제 제법 자란 춘자 할머니의 손자가 앉아 조잘거렸다.
“삼촌, 저도 나중에 삼촌처럼 멋진 수의사가 될래요! 아니, 해남이 되어서 할머니처럼 바다를 지킬래요!”
태웅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거칠었던 손은 이제 생명을 어루만지고, 공동체를 보듬는 따뜻한 손이 되어 있었다. 과거의 ‘독사’는 죽었다. 지금 여기, 바다와 함께 살아 숨 쉬는 한 사람, 강태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찾은 것이었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 방어기제 - 승화 (Sublimation): 강태웅은 과거 조폭 두목 ‘독사’로서 가졌을 법한 공격성, 지배욕, 또는 상황 통제 욕구 등의 사회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충동들을 동물들을 치료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이타적인 행동으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발업자들 앞에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부정을 폭로하는 장면은 과거의 카리스마와 문제 해결 능력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식으로 발휘하는 승화의 좋은 예입니다. 이는 자신의 본능적 에너지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는 성숙한 방어기제라 할 수 있습니다.
- 자기 효능감 (Self-Efficacy)의 점진적 발달: 태웅은 처음에는 과거를 숨기고 소극적으로 행동하지만, 낡은 산소통을 몰래 고쳐주는 작은 성공 경험을 시작으로 점차 공동체에 기여하는 행동을 늘려갑니다. 해녀 학교 학생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조언을 건네는 과정,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발업자들과의 대치 상황에서 마을을 지켜내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에 대한 믿음, 즉 자기 효능감을 회복하고 강화시켜 나갑니다. 이러한 자기 효능감의 상승은 그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됩니다.
- 사회적 지지 (Social Support)와 회복탄력성 (Resilience): 춘자 할머니를 비롯한 마을 공동체는 태웅에게 중요한 사회적 지지 기반을 제공합니다. 특히 춘자 할머니의 "사람 과거가 밥 먹여주나?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지"라는 말은 그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고 현재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강력한 수용의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긍정적 피드백과 지지는 태웅이 과거의 상처나 죄책감으로부터 회복하고, 어려운 상황(개발업자들의 위협)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 인지 부조화 감소 (Cognitive Dissonance Reduction): 태웅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독사'로서의 삶)와 현재의 선량한 수의사로서의 삶 사이에서 내적인 불일치, 즉 인지 부조화를 경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마을에 기여하고 타인을 돕는 행동을 통해 이러한 부조화를 줄여나가려 합니다. 개발업자들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행동은 그의 새로운 정체성(선량하고 정의로운 강 원장)을 강화하고, 과거의 부정적 자아상과 현재의 긍정적 자아상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춘자 할머니의 인정은 이러한 인지 부조화 해소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합니다.
- 집단 정체성 (Group Identity) 및 공동체 의식의 강화: 소설은 해녀 학교라는 매개를 통해 사라져가는 전통을 잇고, 외부의 위협(개발업자)에 맞서면서 마을 공동체의 결속력이 강화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오합지졸이었던 해녀 학교 학생들이 점차 해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마을 주민 전체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단결하는 모습은 강한 집단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잘 나타냅니다. 태웅 또한 이러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점차 받아들여지면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 애착 형성의 재경험 (Re-experiencing Attachment Formation): 태웅이 과거 어떤 애착 유형을 가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새로운 환경에서 춘자 할머니와 같이 안정적이고 수용적인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긍정적인 애착을 재경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춘자 할머니의 따뜻한 관심과 지지는 마치 안전 기지(secure base)처럼 작용하여, 태웅이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정서적 안정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는 성인기에도 긍정적인 대인 관계를 통해 과거의 불안정한 애착 경험이 치유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