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라디오의 시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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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쌓인 할아버지의 라디오 수리점은 마치 시간이 멈춘 섬 같았다.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는 온갖 종류의 낡은 라디오와 부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민준은 코를 킁킁거리며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납땜 냄새를 맡았다.

 

이 가게를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그가 어릴 적, 할아버지는 늘 이 작은 공간에서 라디오와 씨름하며 세월을 보냈었다.

 

한쪽 구석, 빛바랜 천에 덮인 채 잊혀진 듯 놓여 있는 라디오 하나가 민준의 눈길을 끌었다. 투박한 나무 상자에 커다란 다이얼 두 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스위치들이 달린, 그야말로 골동품이었다.

 

“이건 또 뭐람.”

 

민준은 호기심에 천을 걷어내고 전원 코드를 찾아 꽂았다.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불이 들어왔다. 주파수 다이얼을 천천히 돌리자, 갑자기 잡음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내 말 들려요?”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민준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가게 안에는 자신뿐이었다.

 

누구…세요?”

가 더듬거리며 묻자,

 

소녀는 깔깔 웃었다.

 

와, 드디어 연결됐나 봐! 아저씨, 혹시 미래에서 오셨어요?”

미래? 민준은 어리둥절했다.

장난 전화인가 싶었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생생했다. 몇 번의 대화 끝에 민준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낡은 라디오는 특정 주파수를 맞추면, 과거의 어느 시점과 연결되는 신비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소녀는 자신을 1978년에 사는 ‘수진’이라고 소개했다.

 

그날부터 민준의 평범했던 일상은 작은 비밀로 설레기 시작했다. 매일 밤, 그는 할아버지의 라디오 앞에 앉아 과거와 접속했다. 수진이뿐 아니었다.

 

 

6.25 전쟁 직후, 먹고 살 길이 막막해 한숨짓던 젊은 가장의 떨리는 목소리,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들떠 있던 대학생의 유쾌한 수다, IMF 외환위기로 실직하고 좌절한 중년 남성의 울먹임까지. 민준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때로는 서툰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한번은 1985년, 고등학생 아들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밤잠을 설치던 어머니와 연결된 적이 있었다.

 

애 아빠 월급만 가지고는 턱도 없고… 속상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겠고….”

 

한숨 섞인 그녀의 말에 민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혹시…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실래요? 그때는 아마… 은행에 돈을 그냥 넣어두는 것 말고도, 좀 더 불릴 수 있는 방법들이 있을 거예요. 물론 위험할 수도 있지만….”

 

민준은 자신이 아는 선에서 주식이나 펀드 같은 개념을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었다. 반신반의하던 어머니는 며칠 뒤, “정말 고맙네, 젊은이. 자네 말 듣고 용기 내서 은행에 상담이라도 받아보려고 하네.”라며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인사했다.

 

 

민준 역시 과거의 지혜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취업 준비로 번번이 낙방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연결된 1960년대의 한 시골 할머니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할머니, 저는 뭘 해도 안 되는 놈인가 봐요.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 같아요.”

 

한참을 조용히 듣고 있던 할머니는 나지막이 말했다.

“젊은이,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여. 지금 당장 꽃이 안 핀다고 해서, 자네가 꽃이 아니란 뜻은 아니네. 다 때가 있는 것이지. 넘어져도 괜찮으니께, 다시 일어날 궁리만 하더라고.

 

할머니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위로는 그 어떤 명사의 강연보다 민준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교류가 이어지던 어느 날, 라디오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연결도 불안정해, 목소리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민준은 직감했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하필이면 그때, 늘 씩씩했던 수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저씨… 나, 내일 피아노 콩쿠르인데… 너무 떨려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엄마 아빠 기대가 큰데, 망치면 어떡하죠?”

 

민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든 힘을 주고 싶었지만, 라디오는 이제 거의 숨넘어가는 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수진아! 내 말 들려? 괜찮아, 넌 잘할 수 있어! 내가 여기서 응원하고 있을게!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건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야. 그냥… 그냥, 아주 가끔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란다.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네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거야!” 민준은 목이 메어 소리쳤다.

 

“아…저…씨… 고마…워…요…”

 

수진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다, 이내 라디오는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 뒤로 아무리 다이얼을 돌려도, 그 어떤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듯,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민준은 며칠을 멍하니 보냈다.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따뜻한 것으로 가득 채워진 기분도 들었다.

 

몇 달 후, 민준은 우연히 인터넷에서 오래된 신문 기사들을 검색하다가 눈에 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1978년 전국 학생 피아노 콩쿠르 대상, 김수진’. 사진 속에는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는 어린 수진이의 모습이 있었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할아버지의 낡은 라디오는 더 이상 과거와 연결되지 않았지만, 민준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 배운 따뜻한 연결의 힘을 잊지 않기로 했다.

 

 

이제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마음에 작은 등불을 켜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수리점 한쪽에 작은 상담 공간을 마련하고, ‘마음 수리점’이라는 간판을 새로 내걸기로 마음먹었다. 목소리 하나로 시작된 기적. 시간의 강물 저편에서 건네 온 작은 온기가, 그의 삶을 새롭게 밝혀주고 있었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1. 이타주의 (Altruism) 및 공감 (Empathy): 주인공 민준이 과거 인물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아무런 대가 없이 그들을 돕고자 하는 모습에서 순수한 이타주의적 동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1985년 어머니에게 금융 정보를 제공하거나, 수진이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는 장면 등은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고 도움을 주려는 민준의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2. 사회적 연결감 (Sense of Social Connection) 및 소속감 (Belongingness): 민준은 낡은 라디오를 통해 익명의 과거 사람들과 소통하며 깊은 유대감과 정서적 만족감을 경험합니다. 취업 준비로 인해 사회적으로 고립감을 느끼던 그에게 이러한 연결은 외로움을 해소하고 세상과 이어져 있다는 느낌, 즉 소속감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기본적인 사회적 욕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3. 시간 관점 치료 (Time Perspective Therapy)의 요소: 민준은 과거의 인물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삶과 지혜를 접하고, 동시에 자신의 현재 고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습니다. 예를 들어, 시골 할머니의 조언을 통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는 장면은 과거의 긍정적인 경험이 현재의 태도와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시간 관점 치료에서 과거-긍정, 현재-쾌락, 미래-목표 지향적 관점 등을 균형 있게 활용하여 심리적 안녕감을 높이는 원리와 유사합니다.
  4. 상실과 애도 과정 (Grief and Mourning Process): 라디오와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 민준이 느끼는 아쉬움과 텅 빈 듯한 감정은 소중한 관계의 상실에 따른 자연스러운 애도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만 머무르지 않고, 라디오를 통해 경험한 긍정적인 기억과 교훈(따뜻한 연결의 힘)을 내면화하여 새로운 삶의 목표(‘마음 수리점’)를 설정하는 등 건설적인 방식으로 상실감을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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