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꿍이었던 그 애, 양봉 지도사가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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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꿍이었던 그 애, 양봉 지도사가 되어 돌아왔다

열쇠 없는 집, 돌아온 밤

막차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 끼익 멈추자 지훈은 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캄캄한 신작로에 내려섰다. 열다섯 해 만의 귀향이었는데, 반가움보다 먼저 올라오는 건 두 시간 전 걸려온 전화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서울에서 수의사로 일하다 원장과 다투고 그만둔 지 두 달, 딱히 돌아갈 곳도 없던 지훈에게

이 귀향은 준비 없이 떠밀려 온 일이었다

.

두 시간 전, 서울의 좁은 고시원 방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지훈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역으로 뛰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떨려서 표를 끊는 손끝마저 허둥지둥했다.

"지훈아, 큰일 났다! 아버지가 갑자기 마당에서 쓰러지셨어. 지금 바로 내려와야 해!"

"네? 아니, 언제요? 어디가 어떻게... 아저씨, 자세히 좀요!"

이웃집 아저씨는 횡설수설하며 전화를 끊었고, 지훈은 세 시간 버스 안에서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집은 불빛 하나 없이 캄캄했고 대문 손잡이를 당겨도 쇳소리만 철컹철컹 울릴 뿐 꼼짝하지 않았다. 열쇠를 어디 두는지 물을 정신도 없었던 터라 지훈은 결국 담장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 구석 벌통에서 낮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지훈의 등줄기가 서늘하게 굳었다. 손전등 불빛 아래 벌통 다섯 통이 나란히 놓인 걸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기억 하나가 불쑥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묵을 담요라도 찾으려 창고 문을 열었다가, 먼지 쌓인 종이상자 속에서 빛바랜 상장들과 함께 손글씨로 쓴 칭찬카드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엔 ‘다친 친구를 위해 선생님을 불러온 지훈이를 칭찬합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는데,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별생각 없이 그 카드를 점퍼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벌통 앞에서 무너지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로 아버지의 상태를 전해 들었다. 뇌출혈로 응급 수술을 받았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최소 한 달은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는 설명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마당 한쪽에서 윙윙거리던 벌통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제는 자신이 그것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쿵 하고 가슴을 눌렀다.

조심조심 다가가 벌통 뚜껑을 살짝 들어 올린 순간 지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닥에 죽은 벌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고, 살아 있는 벌들마저 날개가 축 처져 겨우겨우 기어다니고 있었다. 정확한 병명은 몰라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만큼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 이걸 어떡하지... 아버지는 저 상태고, 벌통은 이 지경이고..."

그날 오후 마을 이장이 찾아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버지가 농협에서 삼천만 원 넘게 빌린 돈 때문에 저수지 옆 과수원 땅 육백 평이 보름 뒤 경매에 넘어갈 처지라는 것이었다. 꿀 수확으로 이자 일부를 메우기로 약속해둔 터라, 벌통이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지훈아, 이게 그냥 벌통이 아니고 네 아버지 평생 전부여. 보름 안에 꿀을 못 보여주면 그 땅, 그대로 넘어가 버려."

"보름이요? 겨우 보름 남았다고요, 지금요?"

이튿날 아침 지훈은 방충복도 없이 무작정 벌통에 손을 대보려 했다. 뚜껑을 들어 올리는 순간 벌 두어 마리가 손등에 달려들었고, 따끔한 통증과 함께 어릴 적 그날의 비명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지훈은 벌통을 내팽개치듯 놓고 마당을 가로질러 허둥지둥 도망쳤다.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얼굴

병원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던 지훈 옆으로 낯익은 얼굴이 다가와 섰다. 작업복 위에 농업기술센터 조끼를 걸치고 안전모를 옆구리에 낀 여자였는데, 눈매가 묘하게 눈에 익어 지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자꾸 돌려 쳐다보았다.

"너... 강지훈?"

"어, 어... 윤서야?"

"와, 진짜 십오 년 만이네. 안 늙었다, 너?"

"너야말로. 그때보다 더 무서워졌는데, 그거 알아?"

윤서가 푸훗 웃음을 터뜨리며 지훈의 어깨를 툭 치자, 두 사람은 버스가 두 대나 그냥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정류장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윤서는 대학에서 곤충학을 전공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기술센터에서 양봉 지도사로 삼 년째 일하고 있다고 했다. 지훈이 아버지의 벌통 이야기를 꺼내자 웃고 있던 윤서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벌통 상태가 어떤데? 심각해? 내가 가서 한번 볼게."

응애와 여왕벌, 윤서의 계획

그날 오후 윤서는 방충복을 챙겨 들고 지훈의 집으로 찾아왔다. 벌통을 열어 살피던 윤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바닥에 떨어진 죽은 벌들을 핀셋으로 집어 들며 작은 진드기 같은 벌레를 발견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응애야. 이대로 두면 보름도 못 가서 벌통 전체가 죽어. 다섯 통 다."

윤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개미산 성분으로 응애를 방제하고, 동시에 약해진 여왕벌을 더 건강한 여왕벌로 교체해야 벌통이 되살아날 가망이 있다고 했다. 다행히 산 너머 마을에 알고 지내는 양봉 농가가 건강한 여왕벌 한 마리를 분양해줄 수 있다고 덧붙였는데, 거기까지 왕복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여왕벌을 교체하는 작업은 벌통을 열고 벌들을 직접 손으로 다뤄야 하는 일이라, 혼자서는 도저히 손이 모자란다고 윤서는 말했다. 보름이라는 시한 안에 방제와 교체, 적응까지 마쳐야 과수원 땅을 지킬 수 있다는 말에 지훈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결국 지훈이 직접 방충복을 입고 벌통 앞에 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 벌 못 만져. 그때 일 알잖아."

지훈의 말에 윤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그날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서가 들고 있던 방충복을 지훈 쪽으로 쑥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안 하면 벌통 다 죽어. 네 아버지 땅도 날아가고. 선택은 네가 해."

지훈은 밤새 병실의 아버지 얼굴을 떠올렸다. 눈을 감은 채 주사줄에 매달려 있던 야윈 손을 생각하다가, 결국 다음 날 새벽 벌통 앞에 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방충복을 입던 날

다음 날 새벽,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방충복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윤서가 옆에서 여왕벌 케이지를 들고 조심스레 벌통 가까이 다가가자, 지훈도 숨을 깊이 들이쉬며 뚜껑을 들어 올렸다. 벌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이번엔 도망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런데 벌들이 손등 가까이 몰려드는 순간 지훈의 손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쥐고 있던 여왕벌 케이지가 철퍼덕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뚜껑이 열렸고, 귀한 여왕벌이 날아올라 벌떼 속으로 섞여 들어가 버렸다. 윤서가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저거 구하려고 내가 어제 세 시간을 운전했는데!"

"너 그때도 그랬어. 나 쏘여서 쓰러졌을 때, 너 혼자 도망쳤잖아. 지금도 똑같아."

"내가 언제 도망쳤다고 그래! 나도 기억 다 안 나, 근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지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억울한 마음이 울컥 치솟았지만, 정작 그날의 기억이 희미해서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윤서는 더 말을 섞지 않고 방충복을 벗어 던지듯 내려놓고는 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고, 벌통 앞에는 지훈 혼자 흩어진 벌떼와 함께 덩그러니 남았다.

그날 네가 도망친 게 아니었어

허탈하게 주저앉은 지훈이 점퍼 주머니를 뒤적이다 손끝에 뭔가 걸렸다. 어젯밤 창고에서 집어넣고 깜빡 잊고 있던 그 칭찬카드였다.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펼쳐 다시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뚝 하고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지훈은 희미한 기억의 조각을 더듬어갔다. 벌에 쏘인 윤서를 두고 달려간 게 아니라, 교무실까지 숨도 안 쉬고 뛰어가 최 선생님을 모셔온 거였다. 윤서가 쓰러지며 눈을 감았을 때 지훈은 이미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으니, 윤서는 그 뒷모습을 보지 못한 채 그가 그냥 사라졌다고만 믿어버린 것이었다.

같은 날을 두고,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기억을 안고 십오 년을 살아왔다.

지훈은 벌떼가 가라앉기를 기다릴 틈도 없이 카드를 손에 쥐고 윤서를 찾아 나섰다. 농업기술센터 사무실 앞에서 막 퇴근하려던 윤서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며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윤서가 종이를 받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최 선생님의 글씨를 알아보는 순간 윤서의 눈앞에 그날의 장면이 다시 펼쳐졌다.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건 분명 교무실 쪽으로 정신없이 뛰어가던 지훈의 뒷모습이었는데, 깨어난 뒤 그가 보이지 않자 자기도 모르게 그 기억을 도망친 모습으로 바꿔버렸던 거였다.

"미안해...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십오 년을 산 거야?"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한 거 아니야. 나도 그때 바로 설명 못 하고 그냥 서울로 떠나버려서... 그게 더 미안해."

두 사람은 말없이 벌통으로 되돌아갔고, 이번엔 윤서가 벌떼를 가라앉히는 연기를 피우는 동안 지훈이 떨리지 않는 손으로 흩어진 여왕벌을 찾아 케이지에 조심스레 옮겨 담았다.

다시 꽃이 피는 마을

그로부터 열흘 동안 두 사람은 매일 새벽 벌통 앞에 섰다. 개미산 방제를 마치고 새 여왕벌이 자리를 잡아가자, 하루 수십 마리씩 죽어 떨어지던 벌의 수가 사흘째부터는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벌통 입구를 들락거리는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다시 씩씩하게 들려오는 날, 지훈은 처음으로 벌통 앞에서 숨을 길게 내쉬며 웃었다.

경매일을 닷새 앞두고 이장과 함께 농협을 찾아간 지훈은 회복된 벌통 사진과 첫 수확한 꿀 세 병을 조합장 앞에 내밀었다. 조합장은 꿀통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흠... 이자 밀린 게 벌써 두 달인데, 꿀 세 병으로는 어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상환 계획을 바꿔드리기가..."

"세 병이 끝이 아니에요. 다음 달부터 매달 수확량 전부 가져오겠습니다. 저 서울 수의사 자리 완전히 접고 여기 눌러앉을 거예요."

지훈이 가방에서 벌통 다섯 통의 회복 기록을 적은 종이를 꺼내 내밀자, 조합장은 한참 들여다보다가 허, 참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이자 상환 계획을 조정해주며 경매를 넉 달 뒤로 미뤄주겠다고 약속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눈을 끔뻑이다가 지훈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다... 괜히 왔다 싶었는데, 잘 왔다."

서울로 돌아갈 짐을 챙기려던 지훈은 결국 가방을 다시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몸을 추스를 때까지, 그리고 벌통이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는 고향에 남기로 한 것이다.

"그럼 이제 내가 매일 와서 감시해야겠네."

"감시는 무슨, 교대근무지 교대근무."

늦가을 아침, 지훈은 방충복 없이 맨손으로 벌통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벌들이 분주히 꿀을 모아 나르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지훈은 주머니 속 낡은 칭찬카드를 꺼내 작은 액자에 넣고 벌통 옆 기둥에 조심스레 걸어두었다. 윙윙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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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재구성

윤서는 쓰러지기 직전 본 지훈의 뒷모습만으로 '도망쳤다'는 결말을 스스로 채워 넣어 십오 년을 믿고 살았어요.
사람은 기억의 빈 부분을 그때의 감정에 맞춰 메우는 경향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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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 행동의 고착

지훈이 벌 소리만 들어도 몸이 굳고 도망친 건, 어린 시절 해소되지 못한 공포가 몸에 각인되어 성인이 된 뒤에도 같은 자극 앞에서 반사적으로 되살아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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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의 방향 차이

지훈은 자신이 도망쳤다는 죄책감을, 윤서는 혼자 버려졌다는 서운함을 각자 안고 살았어요.
같은 사건을 두고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감정을 쌓아간 모습이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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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감정의 폭발 지점

여왕벌 케이지를 놓친 작은 실수가 십오 년 묵은 감정을 터뜨리는 계기가 된 건, 사소한 사건이 쌓여 있던 감정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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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를 통한 신뢰 회복

말로는 좀처럼 풀리지 않던 오해가 칭찬카드라는 구체적인 물증을 보고서야 풀렸어요.
사람은 감정적인 설득보다 눈앞의 객관적 증거 앞에서 마음을 더 쉽게 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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