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끝낸 그녀, 새벽 빵집 앞에서 멈춰 섰다

꽃집 셔터를 내린 여자, 손끝의 저림
유방암 2기 수술을 받고 여덟 번의 항암 주사까지 끝낸 지 벌써 여덟 달째였지만, 서윤아는 여전히 꽃집 셔터를 반도 올리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했다. 손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저릿저릿했고, 찬물에 꽃대를 다듬다 보면 작은 가위조차 철퍼덕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잦았다. 한때는 새벽마다 동네 빵집 앞을 지나며 갓 구운 빵 냄새에 배를 채우고 출근하던, 그 흔한 아침이 이제는 먼 옛날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거울 앞에 서는 것조차 버거워, 윤아는 하루 종일 커튼을 쳐두고 모자와 스카프로 머리를 가린 채 지냈다. 수술 자국이 당길 때마다 숨이 턱 막혔고, 사람들 눈을 마주치는 일이 두려워 장도 늘 인터넷으로만 봤다. 열다섯 살 딸 유나와도 언제부턴가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 둘 사이엔 서먹한 공기만 자꾸 쭈뼛쭈뼛 쌓여갔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예전처럼 평범한 아침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유나의 부탁, 쾅 닫힌 문
그날 저녁, 유나는 숙제를 하다 말고 식탁 앞으로 와서 쭈뼛쭈뼛 말을 꺼냈다. 다음 날이 학교 바자회라 롤빵과 식빵을 몇 개 사 가야 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문 열자마자 가야 좋은 빵을 고를 수 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고 했다. 윤아는 숟가락을 든 채로 잠시 멈췄다. 사람 많은 곳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나갈 생각을 하니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았고, 거울 속 자신의 수척한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엄마, 내일 아침 일곱 시에 빵집 가서 식빵이랑 롤빵 좀 사다 주면 안 돼? 늦게 가면 다 팔리고 없단 말이야."
"엄마가… 요즘 사람 많은 데 나가는 게 좀 그래. 아빠한테 부탁해 보면 안 될까?"
"맨날 그 소리! 엄마는 맨날 못 나가, 못 나가, 그 말만 하잖아!"
쾅, 방문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윤아는 식탁에 그대로 앉아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결국 울컥 목이 메어 왔다. 그날 밤 그녀는 뒤척뒤척, 저릿한 손끝을 쥐었다 폈다 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창밖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에야, 그녀는 문득 마음을 굳혔다. 내일은, 딱 한 번만이라도 문밖에 나가보자고.

새벽 빵집, 절뚝이는 사장님을 만나다
다음 날 새벽 다섯 시 반, 윤아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아직 깜깜한 골목을 지나 빵집 앞에 다다르자, 창 안쪽엔 이미 노란 불빛이 켜져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밀가루를 뒤집어쓴 준태 아저씨가 절뚝절뚝 걸으며 반죽을 치대는 모습이 보였다. 윤아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참을 망설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지만, 유나의 서운한 얼굴이 떠올라 겨우 문을 밀고 들어가 쭈뼛쭈뼛 롤빵과 식빵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어이쿠, 이 시간에 누구신가 했네. 꽃집 사장님 아니오? 이야, 참 오랜만이네요."
준태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슬쩍 보더니, 별말 없이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오븐 쪽을 오가다 식어가는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가게 안엔 갓 구운 빵 냄새가 가득했고, 그 따뜻한 공기에 윤아의 어깨가 조금씩 풀어졌다. 어색한 침묵 끝에, 준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8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었어요. 반년은 가게 문도 못 열고, 이 손으로 반죽 한 번 못 쥐었지. 지금도 이렇게 다리를 절어요, 허허."
윤아는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조금 꺼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대신 가방을 뒤적이다 저혈당 올 때 먹으려고 늘 챙겨 다니는 사탕 한 알을 꺼내더니, 손바닥 위에 올려 준태에게 건넸다.
"이거… 아저씨도 끼니 거르지 마세요. 저도 그래서 사탕을 항상 갖고 다녀요.
당 떨어지면 훅 가거든요
."

롤빵 하나, 반죽 한 덩이 — 준태의 처방
"거창한 거 하지 말고, 딱 세 가지만 해봐요. 아침 일곱 시에 여기 와서 롤빵 하나씩 사 가는 거, 토요일엔 여기서 반죽 좀 거들어주는 거, 그리고 다음 달 복지관에서 하는 손빵공방이라는 모임에 한 번 나가보는 거. 어려우면 중간에 그만둬도 괜찮으니까."
윤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세 가지라니, 생각보다 간단해서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가슴 한편에선 벌써부터 걱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손이 이래서, 반죽 같은 건 엄두도 안 나는데."
"
손은 쓰면 돌아와요
. 내가 그 증인이잖아요, 허허. 걱정 말고 내일부터 그냥 와요. 롤빵값만 내면 되니까."
그날 밤, 윤아는 조심스레 유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낮에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할 자신은 없었지만,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손에 든 식빵 봉지를 식탁 위에 슬쩍 올려놓으며, 그녀는 겨우 입을 뗐다.
"진짜? 그럼 내일부터 진짜 매일 가는 거야?"
"응, 일단 해보려고. 안 되면… 또 말할게."

손이 떨리던 날, 다시 움츠러들다
그 뒤로 윤아는 매일 아침 일곱 시, 빵집 문 앞에 섰다. 처음엔 어색하기만 하던 걸음이 보름쯤 지나자 제법 익숙해졌고, 손님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일도 조금씩 편해졌다. 토요일마다 반죽을 거들며 뻣뻣하던 손가락도 눈에 띄게 풀리는 듯했다. 그러던 다섯 번째 토요일, 저릿한 손끝이 말을 안 들어 뜨거운 오븐 트레이를 놓칠 뻔했는데, 준태가 재빨리 팔을 붙잡아 준 덕에 겨우 화상을 면했다.
"허허, 괜찮아요 괜찮아. 다치지 않았으면 된 거지. 다음 주에도 또 와요, 응?"
하지만 윤아는 그 일로 다시 움츠러들었다. 손이 또 말을 안 들을까 봐, 또 누군가에게 짐이 될까 봐 겁이 났고, 결국 사흘째 빵집 발길을 끊었다. 유나는 그 변화를 금세 알아채고, 저녁상을 치우다 말고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요즘 왜 또 안 나가? 빵집 아저씨가 뭐라고 했어?"
"아니… 그냥, 좀 무서워서. 괜히 또 다칠까 봐. 민폐 끼칠까 봐 그래."
유나는 그 말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전처럼 쾅 하고 쏘아붙이는 대신, 접시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가봐. 손 다칠까 봐 걱정되는 거면, 다치지 말라고 조심하면 되잖아. 아저씨가 붙잡아줬다며. 그럼 괜찮은 거 아니야?"
딸의 그 짧은 한마디가 뜻밖에도 묵직하게 가슴에 박혔다. 윤아는 그날 밤 다시 저릿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생각했고, 다음 날 아침 결국 손빵공방 데뷔를 앞둔 바자회 전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앞치마를 챙겨 들었다.

유나의 한마디, 쓰러진 건 뜻밖에도 준태였다
마침내 손빵공방 데뷔 날이 되었다. 복지관 강당엔 환자복 대신 앞치마를 두른 사람들이 가득 모였고, 유나도 구경하러 오기로 했다. 준태는 이른 새벽부터 재료를 손질하느라 정작 자기 아침은 거른 채 손님들을 맞이했고, 쉴 새 없이 밀가루를 반죽하고 오븐을 들락거렸다. 집을 나서기 전, 유나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윤아를 보며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엄마, 그래도 가는 거지? 중간에 또 무섭다고 돌아오면 안 돼."
"그래, 간다니까. 약속한 거 지켜야지."
행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준태가 갑자기 이마에 식은땀을 뚝뚝 흘리더니 휘청, 그대로 밀가루 포대 위로 철퍼덕 쓰러졌다. 강당 안이 순식간에 웅성웅성 술렁였고,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윤아는 그 순간 온몸이 굳었다가, 문득 며칠 전 자기가 건넸던 사탕과 그가 끼니를 자주 거른다던 말이 번쩍 떠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달려가 그의 두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고, 가방 속 사탕을 꺼내 입에 넣어 주며 주변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설탕물이요! 누가 설탕물이나 주스 좀 가져다주세요, 빨리요!"
손이 떨렸지만, 신기하게도 머릿속은 또렷했다. 어느새 뛰어온 유나가 놀란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며 다급히 물었다.
"엄마! 엄마 괜찮아? 아저씨 왜 이래, 숨은 쉬어?"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준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허허… 또 사탕 신세 지네, 내가. 이것 참, 꽃집 사장님한테 자꾸 빚만 지고."
병원에서는 준태의 쓰러짐이 저혈당 쇼크 때문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뒤, 윤아는 그날 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전과는 달라 보였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워 움츠러들었던 손이
누군가를 살리는 손으로 바뀌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그 뒤로 준태는 끼니를 거르지 않으려 애썼고, 윤아는 그 일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손빵공방에 정식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자 그녀는 꽃집 셔터도 끝까지 올리기로 마음먹었고, 매일 아침 일곱 시면 유나와 나란히 빵집에 들러 롤빵을 사 먹는 일이 어느새 두 사람의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엄마, 이제 흉터 가리려고 스카프 안 쓰네?"
"어, 그러게. 이젠 뭐… 훈장이지 뭐, 그치?"
이른 아침 햇살이 골목 끝까지 번져올 무렵, 윤아는 꽃집 셔터를 끝까지 올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러고는 손에 든 롤빵 봉지 하나를 꺼내, 갓 꽂아 놓은 꽃병 옆 작은 접시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사회적 위축(회피 행동)
수술 후 체력과 외모 변화로 윤아가 거울을 피하고 모자와 스카프로 자신을 가린 채 꽃집 셔터를 올리지 못하는 모습에서, 질병 이후 흔히 나타나는 외출·대인접촉 회피가 드러나요.
동병상련 효과로 마음을 여는 것
준태가 먼저 자신의 뇌졸중 경험과 떨리는 손을 꺼내 보이자, 윤아가 처음으로 낯선 사람에게 속마음을 조금 내보이는 장면에서 같은 처지를 겪은 사람 앞에서 방어가 풀리는 모습이 나타나요.
실패 경험 후의 재회피(퇴행)
오븐 트레이를 놓칠 뻔한 사고 이후 윤아가 사흘이나 발길을 끊는 장면은, 회복 과정에서 한 번의 실수가 다시 불안과 위축을 불러오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줘요.
역할 반전이 주는 치유 효과
줄곧 도움을 받던 입장이던 윤아가 준태가 쓰러진 순간 주저 없이 나서서 그를 구하는데, 이 경험이 환자였던 자신을 다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해 회복감을 키워요.
작은 친절의 순환(호혜성)
초반에 윤아가 무심코 건넸던 사탕 한 알이 훗날 준태를 구하는 결정적 단서로 돌아오면서, 사소한 호의가 관계 안에서 돌고 도는 모습을 보여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