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그리기 시작한 날
1. 이름 없는 뮤즈화가 이선우의 작업실은 수많은 얼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모든 얼굴은 결국 하나의 얼굴이었다. 어떤 그림에서는 새벽녘 안개 속에 서 있었고, 다른 그림에서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책을 읽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무심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표정도, 배경도, 색채도 모두 달랐지만, 그를 사로잡은 고요한 눈매와 입가의 희미한 미소, 그리고 왼쪽 눈 아래의 작은 점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화가였다.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에 대한 탐구’라 칭했고, 컬렉터들은 그의 그림에 담긴 아련한 감성에 열광했다. 하지만 선우 자신은 거대한 사기극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이 모델은 누구입니까? 작가님의 연인인가요?” 전시회에서 수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