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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 끝낸 그녀, 새벽 빵집 앞에서 멈춰 섰다꽃집 셔터를 내린 여자, 손끝의 저림유방암 2기 수술을 받고 여덟 번의 항암 주사까지 끝낸 지 벌써 여덟 달째였지만, 서윤아는 여전히 꽃집 셔터를 반도 올리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했다. 손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저릿저릿했고, 찬물에 꽃대를 다듬다 보면 작은 가위조차 철퍼덕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잦았다. 한때는 새벽마다 동네 빵집 앞을 지나며 갓 구운 빵 냄새에 배를 채우고 출근하던, 그 흔한 아침이 이제는 먼 옛날의 풍경처럼 느껴졌다.거울 앞에 서는 것조차 버거워, 윤아는 하루 종일 커튼을 쳐두고 모자와 스카프로 머리를 가린 채 지냈다. 수술 자국이 당길 때마다 숨이 턱 막혔고, 사람들 눈을 마주치는 일이 두려워 장도 늘 인터넷으로만 봤다. 열다섯 살 딸 ..
이사 가던 날, 고양이가 사라진 그 밤다섯 해를 함께한 두부, 새 보금자리로 이사하던 날연주는 다섯 해 동안 한 몸처럼 붙어 지낸 고양이 두부와 함께, 드디어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날 아침을 맞았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온 지난 몇 년, 반려동물을 받아주는 전셋집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까마득한지는 발품을 팔아 본 사람만 안다며, 연주는 몇 달을 돌고 돌아 겨우 이 집을 찾아낸 참이었다. 두부는 유난히 좁고 어두운 틈을 좋아해서 책장 뒤나 서랍 사이처럼 몸 하나 겨우 들어갈 공간에 쏙 들어가 몇 시간이나 나오지 않는 버릇이 있었는데, 짐을 싸다가 두부가 가장 좋아하는 낡은 방석을 발견했을 때는 버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삿짐 상자 맨 위에 슬쩍 올려 두었다. 모서리가 다 닳고 색도 바랜..
이직 면접 전날 밤, 말기 환자가 건넨 낡은 수첩번아웃 7년차 간호사, 이직 면접 날짜를 받던 밤콜벨이 세 번째로 울리던 밤, 윤서연은 복도 끝 간호사실에서 핸드폰 화면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액정 위에는 '2차 면접: 10월 22일 오전 10시, ○○제약 영업2팀'이라는 문자가 떠 있었고,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내려앉았다. 입사 7년차, 소화기내과 병동에서 밤낮을 갈아 넣은 끝에 겨우 잡은 기회였다.요즘 서연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서서 졸다가 한 정거장을 지나치기를 반복했고, 아침마다 다리가 퉁퉁 부어 신발이 꽉 조였다. 주 3회 나이트, 끝없는 콜벨과 보호자들의 날 선 말들, 그 사이에서자신이 점점 닳아가는 걸 느꼈던 그녀는 이번엔 정말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선생님, 다음 주 나이트 저랑 ..
택시기사 아버지와 재회한 밤, 첫 딸이 태어나다자정에 터진 양수자정 열두 시 사십 분, 서연이 정훈의 팔을 붙잡았다.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이불 위로 번진 물기가 달빛에 어슴푸레 비쳤다."자기야, 나 물 터진 것 같아."그 말에 정훈은 쥐고 있던 태블릿 펜을 떨어뜨렸다.화면엔 마감 사흘 남은 웹툰 47화 배경이 그대로 떠 있었다.펜 끝이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결혼 삼 년 차, 첫 아이였다.예정일은 나흘 뒤, 다음 주 월요일이었는데 아이는 그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았다.산부인과에서 받아온 출산 체크리스트는 서랍 안에서 아직 반도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정훈은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서연의 눈을 봤다.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했고, 이마엔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려 있었다."병원 ..
옛 연인이 살던 그 집으로, 하필 내가 이사를 갔다상자 마흔두 개상자에 마흔두 번째 번호를 적다가 손을 멈췄다.유성펜 뚜껑을 닫는 소리가 텅 빈 방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오 년을 살았던 반지하였다.곰팡이 자국을 가리려고 붙였던 벽지 무늬가 눈에 익었는데, 이제 그 벽지도 남의 것이 된다.재건축 통보를 받은 건 두 달 전이었다.집주인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문자 한 통으로 다음 달 말까지 비워달라고 통보했다.수아는 서른네 살이었다.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육 년째 마감과 씨름하며 이 동네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이 동네에서 태오와 만나고 헤어졌다는 사실은, 그날 아침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이사는 잘 돼가?"친구 은지의 전화였다.수아는 상자 테이프를 뜯다 말고 휴대폰을 어깨에 끼웠다."그냥 그렇지 뭐..